얼마 전 초청을 받아 절강성에서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신선거(神仙居)를 가 보았다. 중국에는 아름다운 지역이 많지만, 이곳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 훌륭한 관광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돌아오는 길에 봉화시에 있는 장개석(蔣介石) 생가를 보기 위해 봉화시에 요청하여 보게 되었다. 그의 생가는 손문(孫文)이나 모택동(毛澤東)의 생가보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훨씬 크고 부유한 집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27년 그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서 몰아내고 공산당이 조직한 노동조합 등을 탄압하여 공산당과 갈라서게 되어 1차 국공(國共)합작이 깨지게 된 것.
그는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기 위해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중국 북부의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대규모 북벌을 개시했다. 1928년 그의 군대가 수도인 북경(北京)에 입성하면서 북벌은 끝났고, 그해 남경(南京)에 국민당 주도의 새 정부가 세워졌다.
그는 공산당을 섬멸하기 전까지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많은 항의를 받았는데, 특히 공산당에 대한 완전 섬멸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서안(西安)의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가 있는 화청지에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학량(張學良)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개석을 그 곳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서안사변이 발생하였다.
이 사변으로 국공(國共)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대 일본 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공산당은 대장정으로 연안(延安)을 수도로하여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학량의 동북군은 고향인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여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고, 공산당의 홍군(紅軍)과의 의미 없는 소모전이었다.
홍군은 포로들에게 '진짜 적은 같은 중국인인 홍군이 아니라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이라'는 지속적인 항일선전을 폈고 이들이 다시 동북군으로 돌아와 동북군 사이에는 항일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장학량 자신도 홍군과의 접촉을 통해 영향을 받았고, 대 일본 전쟁에 소극적인 장개석의 남경정부의 선통일 후 저항 정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12월 7일 장개석은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편으로 직접 서안에 도착하였다.
장학량의 부하들이 장개석을 급습하여 약간의 유혈사태를 치른 후에 잠옷 바람이고 맨발로 도망친 총통을 야산에서 체포한 직후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공산당 대표들이 서안으로 날아왔고 공동 항일투쟁 의사를 발표하였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 장개석은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와 면담을 가졌고 송미령을 비롯한 남경정부의 대표단이 서안으로 날아와 막후협상을 벌였다.
대다수 동북군 장교들은 그를 '인민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및 다른 온건파들은 장개석이 그 지위를 유지하고 10년간의 국공내전이 종식되고 장개석은 따라서 위신이 깎이지 않은 채 남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실각이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의 빌미가 되고 결국 일본만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이때 그의 체면은 손상하지 않기 위해 장학량 자신도 함께 남경으로 가서 스스로 반란에 대한 처벌을 기다렸다.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고 이어 1946년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1949년 장개석은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게 되었고, 국민당 잔여부대를 이끌고 대만(臺灣)으로 건너가서 국민당 지도자들과 함께 비교적 온건한 독재정부를 수립했고, 대만해협을 건너 공산당을 산발적으로 공격했다.
설두산에 들어가기 전에 장학량이 연금되었던 최초의 집이 있다. 장개석은 한이 맺혀, 그를 자기의 고향에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떠나기 전, 그는 다시 고향에 와서 일가친척들을 만나 헤어진 쓸쓸한 장면의 사진들이 걸려 있지만, 그의 생가를 중국정부가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2013년 11월 11일 姜元求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