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절강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신선거를 가게 되었다. 상해에서 출발하여 김구선생이 피난을 했던 가흥의 매만가와 남호과 해염의 재청별서와 36km인 항주만대교를 거쳐 영파로 들어갔다.
영파는 도시 곳곳에서 ‘작은 홍콩’이라는 곳이다. 대륙의 홍콩이라는 영파는 항주만을 사이에 두고 상해와 마주보고 있는 항구로 당나라 때부터 유명한 무역항기도 했다. 옛날의 이름은 명주(明州)였는데, 명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영파로 고쳤다. 그러나 명주를 잊지 않기 위해 영파 시내에 日湖와 月湖라는 호수가 있다.
영파는 편안할 녕(寧)에, 물결 파(波)자를 쓰는데, 파도도 잔잔하다는 뜻이다. 어원은 ‘해정즉파녕(海定則波寧: 바다가 안정되어 파도가 잔잔하다)’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옛날엔 이 항구를 통해 우리나라나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했다.
이 근방의 사투리가 우리말과 비슷한 것이 있다. ‘어서어서’와 ‘바보’라는 말인데, 중국에서 ‘빨리 빨리’가 ‘콰이콰이’인데 ‘어서어서’이며, 어리석은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영파는 ‘월극(越劇)’이 유명하다. 북경의 ‘경극(京劇)’이 남성적이라면 영파의 월극은 여성적이다. 월극이란 명칭은 옛날 이 지역이 월(越)나라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며, 시내 월호 옆에 천일각이란 곳에 월극 무대가 있다.
송나라시대 고려와 많은 관계가 있어 지금도 그 옛날 의 ‘고려사관’이 있고, 시내 중앙에 천일광장이 있다. 구 건물들을 매입하여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시켰으며, 분수대는 싱가폴의 센토사섬 분수대와 비슷하다.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 등 200여명은 이듬해 귀국 뒤에 그 유명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약칭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지어 황제에게 헌상한다. 이에 의하면 서긍 일행이 고려를 향해 당시 송나라 수도 개봉을 출발한 것은 1123년 3월14일. 보통은 요동반도를 따라가는 육로를 택하지만 당시 금(金)이 한창 흥성하던 때라 해로를 이용했다. 이들을 태운 신주(神州)라는 배는 5월 26일 심가문(沈家門)을 출항해 6일 만에 소흑산도에 도착하고 서해 연안항로를 따라 계속 북상해 6월12일 예성항에 입항했다.
나주 출신 최부(崔溥)선생이 1488년 제주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향하던 중 추자도 앞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가 음력 1월 16일 삼문현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도착하였다. 옛날에는 임해현(臨海縣)에 속했으나, 지금은 삼문현(三門縣)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두외양’이 소머리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지금은 산봉우리를 밀어버리느라 한창 공사 중에 있다.
최부선생 일행이 상륙하자, 마을 사람들이 나와 왜구로 오인 받아 죽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왜구가 나타나면 먼저 죽이고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최부선생은 “나는 조선인이니 관청에 알려주라”고 말하였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조선인임이 밝혀지자, 존경과 환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왜구들은 어린애들을 대나무에 메달아 놓고, 뜨거운 물을 끼언저 죽이거나, 임신한 여자들을 아들인가 딸인가 내기해 살아있는 사람의 배를 갈라 아이를 끄집어내는 짓을 하였다.
최부선생은 태주를 출발하여 영파, 소흥, 항주, 소주, 무석, 양주를 거쳐 북경에 도착하였을 때는 황제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으며, 북경을 출발하여 요양, 구련성을 거쳐 135일 만에 귀국하여, 중국 3대 기행문의 하나인 표해록(漂海錄)을 남겼다.
삼문현을 지나 선거현에 도착하면 신선들이 모여 살았다는 신선거가 나온다. 아직 도로 정비가 되지 않아 들어가기가 불편하지만, 장가계도 처음 들어갈 때는 많은 불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잘 되어 있다.
특히 밤에 겨우 찾아 들어갔고, 숙박시설이 불편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주변 산을 보니 정말 신선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블카도 새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위에 오르면 태항산 같은 웅장함과 장가계나 계림 같은 기이함, 여산폭포와 같은 물줄기가 함께 있는 곳으로 한번 가볼만 하다.
2013. 12. 27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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