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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칼럼> 강항문화제, 어디까지 왔나?

올해 영광문화원 주최로 강항선생 세미나만 12월 10일 개최 예정
등록날짜 [ 2014년10월31일 17시22분 ]

1. 강항先生의 어린시절
수은 강항先生은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에서 태어나셨다. 先生은 어려서 特異하고 卓越한 資質이 있었고 기억력이 뛰어나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았다. 16세에 향시에 합격 1588년 進士가 되었고, 1593년 27세 때 文科에 급제 1594년 3월에 교서 정자가 되었다. 


2. 丁酉재란의 義兵活動과 포로생활

1597년 공. 형조 좌랑으로 승진, 先生은 봄에 휴가를 얻어 고향 영광군 불갑면 운제에 와 있다가 정유재란이 터지고 그 해 7월에는 한산 섬의 관문이 무너지고 8월에는 湖南의 中心인 남원이 함락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와 영광에 돌아와 여러 읍에 檄文을 띄워 義兵을 모집했다.  

1597년 9월 14일 왜군에 의해 영광이 불바다가 되자 先生은 염소골 당머리에서 바다로 脫出, 이순신의 陣營으로 합류하려다 奴婢인 뱃사공의 우유부단함으로 이요노카미사오토 부하 신시치로에게 붙잡혔다. 

倭賊의 軍船에 옮겨진 강항선생은 장인이 結縛을 풀어주어 밤중에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倭賊들이 잽싸게 구해내 오히려 통 밧줄에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先生은 血肉으로 하나 뿐인 아들 용과 작은부인의 소생인 따님 애생이마져도 배 안에서 水中孤魂이 되었다.

특히 간양록에 수은선생께서 아들 용에 대해 피력하기를 ‘ 용이 태어나기 전 꿈속에 커다란 용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깨어나서 그 꿈이 하도 신기하여 아들 이름을 용이라 하였는데 네가 저 차가운 바다 속에서 애비이름을 부르며 사라져 가는 것을 보니 분하고 원통해 내 애간장을 끊는구나’며 피눈물로 표출한 내용이 생생하게 현실을 보듯 기록되어 있으며 그 고통을 작은부인마져도 寢食을 잃고 분하고 원통해 하다 끝내 世上을 등졌다.

어디 倭賊의 蠻行이 이뿐이랴!!
倭賊놈들은 先生의 從兄의 아들이 배탈이 나자 그 아이를 산채로 물속에 던져버렸다. 

3. 주자학과 日本생활
先生은 生捕된지 9일 만에 왜선은 순천 좌수영에 이르러 큰 軍船에 옮겨 일본 押送길에 올랐다. 武士인 사무라이가 집권한 침략 당시 일본 爲政者들은 東方禮義之國인 朝鮮이 古來로부터 이어오는 美風良俗과 교육, 문화와 한 國家의 傳統性이 脆弱했다. 그리하여 倭賊들은 朝鮮人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으나 벼슬아치나 陶工 또는 技術者만은 어떻게든 살려서 일본으로 데려갈 侵略政策을 쓰고 있었다. 순천향을 떠난지 8일만에 배는 일본 이요에 入港했다. 이곳에서 다듬어지지도 않은 오솔길을 포로로 끌려가서 오사카에 옮겨지고 또 며칠이 지나 일본의 수도 교토 후미시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행히도 先生은 先生을 알아본 일본의 知識人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들과 교제했는데 그중 일본 朱子學派의 선구자로 알려지고 일본 유학사상의 중요한 歷史的 위치를 차지한 후지하라 세이카에게 더 깊은 주자학을 때론 通譯없이 筆談으로 전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후지하라 세이카는 先生에게 주자학뿐아니라 모든 가르침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마치 익은 벼가 고개를 수그리듯 자연스레 先生을 더 欽慕하고 심지어 승려인 그가 僧服에서 조선인과 똑같은 禮服으로 갈아입고 儒學者 행세를 하였다. 

4. 강항先生의 餘生과 著書紹介
1600년 마침내 先生은 일본 류우노의 성주 아카마쓰의 힘으로 괴롭고도 힘든 포로생활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만 4년후 4월에야 함께 끌려간 식솔과 노비 30여명과 함께 풀려난 先生은 그 해 5월 19일 故國인 부산 땅을 밟는다.

先生은 고향에 돌아와 얼마되지 않아 선조임금이 일본에서의 활동과 생활 ‘적중봉서’ 등으로 先生의 愛國忠節을 알아보고 순천 교수직에 任命하였으나 先生은 많은 죄를 지은 몸이라고 극구 사양한다.

先生은 餘生을 영광군 불갑면 운제에서 밭갈이와 독서와 글을 쓰는 일로 여생을 보내다가 1618년 52세를 일기로 世上을 떠났다.

이후, 先生의 故鄕인 영광에 일본 주자학의 鼻祖가 된 先生의 業績을 새긴 碑가 어연 400년만에야 1995년 영광군 염산면에 세워졌을 뿐이다.

그나마 기념碑가 세워지자 당시 일본과 국내의 學界에서는 至大한 관심을 모았고 1995년 말에는 일본에서 '유학자 강항과 일본'이라는 연구서가 출간되었고 그 이후 더 이상의 강항先生에 대한 業績의 흐름은 斷絶되고 말았다.
先生의 주요 著書로는 「간양록」,「수은집」, 「운제록」, 「건거록 」, 「강감회요」,「좌씨정화」,「문선찬주」등이 있다.

5. 강항문화제후원회의 동향
이러한 한 시대의 文章家요, 주자학의 太豆인 先生을 지금 돌이켜보건데 너무도 평가나 業績에 대한 연구가 부족할 뿐이고 歷史的 고찰이 絶對的으로 필요한 時點인 것.

- 2014년 3월 4일 나주시장에 도전하고 있는 강인규전나주시의회의장의 출판기념회에서 강원구종회장과 강재원수은공종회장, 강대석광주남구종회장이 모여 수은공 강항선생의 업적에 대해 설명말씀이 있었다. 

- 3월 12일 강데의서구종회장은 강원구종회장을 만나 이데이뉴스와 영광신문에 ‘강항선생축제추진위원회’의 기사가 게재되어 지역에서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하다.

- 4월 10일 17시 진주강씨광주전남종친회사무실에서 20명(위임자 포함)의 위원이 모여 ‘강항문화제후원회’로 명칭을 정하고 강대욱회장을 추대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제1차 회의록을 작성하다. 

- 4월 24일 11시 진주강씨광주전남종친회사무실에서 20명(위임자 포함)의 ‘강항문화제후원회’위원들이 후원회칙을 개정해 통과시키고 회의를 진행하여 모든 사안을 강항문화제추진위원회로 넘기기로 결의하고 회의내용을 남기기 위해 제2차 회의록을 작성하다. 

- 6월 26일 15시 광주향교 유도회장실에서 3차 강항문화제후원회의를 갖다. 민선 6기 김준성영광군수 면담건과 향후 강항문화제추진위원회 구성에 대한 회의를 하고 회의록을 작성하다. 

- 7월 10일 14시 영광군수집무실에서 김준성군수와 이하연문화예술관광과장 외 이현정계장, 강대욱회장외 6명이 배석해 40여분 면담하고 강항선생세미나 자금확보를 약속받고 나오다. 

- 이후 8월과 9월에 강대욱회장과 강대의간사가 두 차례 영광군 문화예술과를 방문해 강항선생세미나관련 일정과 내용을 확인하다. 

- 10월 27일 영광군문화관광과장과 통화해 영광문화원으로 주최가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광주향교 유도대학회장실에서 강항문화제후원회 임원긴급회동을 갖다. 

- 11월 2일 정형택영광문화원장과 강대욱후원회장 일행이 만나 직, 간접적으로 강항선생세미나가 성황리에 개최될 수 있도록 조언키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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