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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인영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민족운동가로 나인영과 종교운동가 나철(羅喆)로
등록날짜 [ 2015년02월12일 16시37분 ]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인영(羅寅永 1863〜1916)의 삶은 1909년 음력 1월15일에 서울 재동 취운정에서 열린 단군교 중광이 분수령이다. 그는 민족운동가로서 나인영과 종교운동가로서 나철(羅喆)로 살았다. 

 

나인영은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지주인 나용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학자 집안 출신인 그는 20대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김윤식의 문인이 되었다. 2) 

그가 김윤식의 문인이 된 사연은 이렇다. 나인영은 김윤식을 만나기 어려워, 남산에서 열린 고관들의 시모임에 객으로 참석했다. 거기에서 그는 운(韻)에 따라 시를 지었다.  

‘강남 언덕에서 나래질을 익히고 /
한강 구름 위를 날아왔네. /
고루 거각이 즐비하지만 /
머무를 처마 밑을 얻지 못했네.’
감탄을 금치 못한 김윤식은 그 자리에서 나인영을 제자로 삼았다. 

이후 나인영은 김윤식 문하와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1891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그는 승정원 가주서를 시작으로 병조정랑, 승문원 부정자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95년 4월에는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1897년 12월 스승 김윤식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지자, 그는 1901년에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제주도에서 스승을 모시고 살았다.  

이때 나인영은 김윤식으로부터 귀중한 자산을 전수받았다. 우선 스승이 닦아 놓은 국내외 인맥을 그대로 소개받았고, 또 온건개화사상과 외교독립론을 배웠다.  

1902년부터 나인영은 다시 서울 생활을 하였다. 이때 개혁 성향의 유교 지식인 및 일본 유학생 출신들을 많이 사귀었다.  

우선 강진 출신 오기호는 나인영의 최측근 인사로 자금 마련과 기획력이 뛰어났다. 문장력이 뛰어난 전북 김제 출신 이기(李沂 1848-1909)와 역사에 밝은 홍필주는 청국에서 전해진 근대학문을 섭취한 애국계몽파 인사들이었다. 박영효의 조카 이건은 독립협회운동에 가담한 일본 망명객 출신이었다.  

정운복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애국계몽운동과 신내각 수립운동을 활발히 벌인 유신파 인사였다. 헤이그 밀사 이준의 절친한 친구인 김인식은 정계의 실력자 민영환에게 투신한 개혁 성향의 우국지사였다. 민족주의자로 이름 높은 이회영은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명문 소론 가문의 후예였다.  

나인영은 이들을 통해 향후 민족운동을 같이해 나갈 동지들을 확보해 나갔다. 또 한국 전통 종교와 역사에 대한 지식을 흡수했고, 일본의 사정과 세계 대세를 전해 들었다. 아울러 한국의 독립과 내정개혁에 대한 방안을 함께 고민했다.  

이런 기반 위에서 나인영은 1904년에 호남 출신의 ‘동도서기’계 전 ․ 현직 관리로 구성된 ‘유신회(維新會)’라는 민족운동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일본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 반대운동을 벌인 ‘대한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의 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05년 5월께 러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일제가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조야가 시끌시끌했다.  

나인영은 러일전쟁 강화회의가 열리는 미국 포츠머스로 가서 한국문제를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외부대신 이하영과 일본공사 임권조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나인영은 차선책으로 1905년 8월에 오기호·이기·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10월경에 그는 일본 총리대신· 추밀원장 등 일본의 유력자들에게 만국공법 및 동양평화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며 한·일 관계의 역사적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일본이 수차례 발표했고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에도 기술한 한국의 독립 보장 약속을 이행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나인영은 일본에서 신문을 보고 허탈과 분노가 일었다. 그는 일본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에게 서한을 보내 일제의 한국 침략을 준열히 규탄했다. 또 국가 사이의 조약과 지도자 사이의 약속을 저버린 일본 정부와 요인들의 식언과 배신을 강하게 꾸짖었다.  

이 당시에 나인영등은 조선 조정이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국제법과 동양평화론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일본 집권층에 간절히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허사였다. 일제가 주장하는 한국독립론에는 침략적 정복야욕이 숨어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말한 동양평화론은 허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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