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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인영 3>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나인영, 단군교를 중광하다
등록날짜 [ 2015년02월22일 14시09분 ]

1909년 2월5일 (음력 1월15일) 자시(밤 11시-새벽1시) 서울시 재동 齋洞 취운정 翠雲亭 아래 8통 10호의 6칸 나인영의 초가집에 오혁 · 이기 · 유근 · 정훈모 · 강석기 · 최동식 · 김인식 · 김춘식 · 김윤식 등 6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초가집 북벽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나인영은 ‘단군교 포명서(檀君敎 佈明書)’를 공포하였다. 이는 국조 (國祖) 단군을 받드는 단군교의 중광 선포였다. 고려 원종 때 몽골 침략 이후 700년 동안 끊어졌던 단군교를 새롭게 부흥시킨다는 의미에서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1)

1909년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거의 상실된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인영등은 민족역량을 모을 구심체를 국조 단군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2)

 

그런데 나인영이 단군교를 중광한 사연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1907년 12월 말에 순종의 특사로 풀려난 나인영은 “생명이 붙어있는 한 망국의 백성으로 좌시할 수 없다”는 일념과 굳은 의지로 1908년 11월 7일 오기호와 같이 다시 도일 渡日을 감행한다.  

나인영의 도일목적은 이토 히로부미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의 회담이었다. 이 시기 일본은 가츠라 내각 체제였고, 오쿠마는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다.  

나인영은 오쿠마와의 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다만 대정객 도야마 미츠루(頭山滿), 이토의 사위인 스에마츠 겐초(末松謙澄)등을 면담하고, 재일 망명자와 유학생들을 조우한 선에 그쳤다. 3)  

그런데 나인영 일행이 1908년 12월5일 일본 동경 세이코칸(淸光館)이라는 여관에 투숙하고 있을 때 뜻밖에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백봉신형대종사의 문하인 두일백(杜一白)이었다. 그는 “지난 갑진년(1904년) 음력 10월3일 백두산 대숭전에서 백봉 도사가 그를 비롯한 13인에게 일심계를 주고 단군교포명서를 반포하였으니, 당신의 사명은 이 포명서를 널리 홍보하는 일이요” 라고 말하고 떠났는데 그 자리에 “단군교포명서”라는 책이 있었다. 

한편 나인영은 1906년 1월24일 (음력 1905년 12월 30일) 오후11시경 서대문역에서 백전도사라 칭하는 아흔 살의 노인으로부터 '삼일신고'와 '신사기' 등 두 권의 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백전도사 또한 백봉신대종사의 제자였다.  

그런데 나인영은 1908년 12월31일에 새 거처인 가이헤이칸(蓋平館)에서 두일백을 또 한 번 만난다. 나인영은 건강이 안 좋아 도쿄대 의학부 교수였던 아오야마 다네미치(靑山胤通)박사로부터 12월7일부터 31일까지 당뇨병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홍고구(本鄕區) 모리가와마치(森川町) 1번지 가이헤이칸(蓋平館)에 투숙하였다.  

이날 밤, 홀연히 두일백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말고 즉시 본국으로 돌아가 단군교를 일으켜 동포를 구하라.”고 하면서 단군교의 세례의식인 영계(靈戒)를 하여 주었다. 동석했던 정훈모(1868-1943)가 “교리가 있다는 것을 들은 바 있어서 교문을 세우고자 하는 의욕은 있으나 경전이 전무하여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옵건대 가르침을 주시오.”라고 청하자 두일백 도인은 단군영정과 삼일신고, 성경팔리, 포명서, 역사 예식 등의 서적들을 한 보따리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면 가히 교문을 일으킬 수 있으니 즉시 귀국하라고 당부하였다. 4)  

나인영 등은 일찍이 서울에서 만난 백전도사의 동문 두일백을 동경에서 만난 것을 하늘이 내린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일본 신도(神道)의 중심부에서 단군교의 교맥 전수가 극비리에 완결되었다는 점도 그에게는 경이로웠고, 이는 정치나 외교가 아닌 신앙과 정신으로 구국운동을 벌이라는 메시지였다. 1909년 1월 29일에 나인영은 동경 신바시(新橋)역을 출발하여 홀로 귀국 길에 오른다.  

나인영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밑바탕에 깔려야만 구국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 神道가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작용을 하였다.  

그리하여 나인영은 귀국 후 1주일 후인 2월 5일(음력 1월 15일)에 단군교를 중광한 것이다. 단군교의 맥을 700년 만에 부활시킨 것이다. 5)  

1) 한국의 자생종교는 1860년 최제우의 동학을 비롯하여, 1909년 나인영의 단군교(대종교), 1911년 강증산의 증산교, 1916년 박중빈의 원불교가 각각 시차를 두고 생겨났다.
2) 우리 민족은 역사의 고비 고비 마다 ‘단군왕검의 기억’ 위에 나라를 세운다. 북부여의 해모수 단군, 고구려의 고추모 대왕이나 발해의 대조영 황제도 모두 ‘단군의 계승자’를 자임한다.  이후 고구려의 다물 정신은 고려 태조 왕건으로 이어지고 조선 조 세종 7년에 이르러 세종대왕은 평양에 ‘단군사당’을 건축하고 매년 시월상달에 제향을 받들게 하여 ‘단군이 국조(國祖)’라는 오래 된 기억을 역사에 되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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