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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 등의 만남을 살펴보는 내산서원 답사기를 마친다.
이 답사를 통하여 강항의 일본에서의 포로생활과 후지와라 세이카 등에게 조선 성리학을 가르치고, 20권에 달하는 <사서오경왜훈> 발문을 쓴 것을 알았다. 또한 강항이 조선 성리학을 가르쳤지, 퇴계학을 가르친 것이 아님을 밝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강항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항이나 <간양록>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지 않고 인물평전 한 권 없다.
지금부터라도 강항에 대한 재조명 사업을 하여야 한다. 영광군청과 영광군 문화원이 중심이 되어 강항 알리기에 힘썼으면 한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강항평전부터 만들어 대중화를 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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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강항은 세조 때 명신 사숙재 강희맹의 5대손이며, 강극검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93년(선조 26)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 박사 · 전적을 거쳐, 공조 · 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영광군 수성에 참여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호조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 보급에 나섰다가 남원이 함락 당하였다.
고향인 영광에서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으나 일본이 영광을 함락하자 무산되었다. 이후 강항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순신 수군에 합류하려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 오즈성[大津城]에 압송당하였다.
<간양록>은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서 겪은 포로 생활과 일본의 역사와 지리, 정치상황과 대책 등을 기록한 문집이다. 당시의 여러 일본 견문록 중에서 가장 상세하고 체계적인 저술로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많이 인용하였고, 일본에서도 출간하였다.
<간양록>은 번역본이 3가지이다. 이을호 박사가 번역한 간양록(서해문집, 2005년 발간), 북한 학자 김찬순이 옮긴 간양록(보리, 2006년 발간), 그리고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사이트 <한국고전종합 D/B> '해행총재/에 있는 간양록(신호열 번역, 1974년)이 그것이다.
주2) 일본 에이메현 愛媛県 오즈시 大洲市의 홍유 강항 현창비 鴻儒 姜沆顯彰碑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다.
조선왕조시대의 탁월한 학자 강항(姜沆 号: 睡隠)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으로 재출병(정유재란)때 등당고호(藤堂高虎: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게 포로가 되어 두 형인 준(濬)・환(渙)과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이예(愛媛県)의 대주(大洲)로 연행되었다.
10개월 간 대주성(大洲城)에서 강항 생활은 학자로서 대우를 받아 금산 출석사(金山 出石寺)의 중들과 교유(交遊)하였다. 한시(漢詩)로 응수하며 매일을 자유롭게 보내는 신분이었다.
교토 복견의 등당고호저(藤堂高虎邸)에 이송되어 강호유학(江戸儒學)의 개조(開祖)로 불리는 등원성와(藤原惺窩)와 용야(龍野)의 성주 城主 적송광도(赤松廣道: 아까마스히로미찌), 해운왕 길전소암(海運王 吉田素庵: 요시다 소안) 등과 자유로운 교우 중에 성와는「사서오경왜훈(四書五経倭訓)」을 완성했다.
강항과 두 형 그리고 수십 인이 사서오경(四書五経)의 대자본(大字本)을 필사(筆写)하였다. 성와는 거기에 화훈(和訓:일본어)를 달아 간행하였던 것이다.
근세 일본사상의 전환기에 강항과 등원성와의 우정은 일본인이 부러워할 정도였고, 성와가 유학자(儒学者)로서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항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강항이 일본유학사상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에이메현 愛媛県 오즈시 大洲市의 홍유 강항 현창비 鴻儒 姜沆顯彰碑(1990年3月11日) 부비와 비문에서 副碑・碑文에서> 주3) <간양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