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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이카는 선승이었지만 강항을 만났을 때는 승복을 벗고 유학자의 정장을 입고 강항에게 존경심을 표하였다. 강항은 세이카가 보여준 유학 공부에 대한 진진한 자세에 마음이 움직인 것 같다.
그러면 후지와라 세이카는 누구인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년 ~ 1619년)는 ‘묘수원(妙壽院)의 승려 순수좌(舜首座)’이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이름을 숙 肅이라 했으며 자는 렌부 斂父, 호는 세이카 惺窩이다. 호 세이카(성와 惺窩)는 강항이 순수좌를 위해 쓴 ‘성재기 惺齋記’와 ‘시상와기 是尙窩記’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이 성와(惺窩)호에서도 순수좌의 강항에 대한 흠모를 엿 볼 수 있다.
세이카 집안은 원래 효고현(兵庫縣) 미키시(三木市) 출신으로 장원을 소유한 구 귀족 가문이었다. 세이카 집안은 무사가 아니었지만 무사와 마찬가지로 성을 쌓고 살았다. 그는 일본 중세 가학 歌學의 태두인 후지와라 사다이에 藤原定家(<간양록>에는 경극황문정가(京極黃門定家)로 기록되어 있다)의 후손으로 1561년에 태어났다.
그런데 1578년 세이카의 나이 18세 때, 그의 아버지 관할 성 城이 적군의 급습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고,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하였다. 세이카는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숙부가 주지로 있는 교토의 상국사(相國寺)로 피신했다.
세이카는 상국사에 머물면서 불교를 공부하여 선승(禪僧)이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순수좌(舜首座)라고 불렸는데 순수좌는 사찰에서 주지 다음으로 높은 직책을 말한다.
세이카는 이곳에서 불교경전 외에도 주자학(朱子學)서적을 접하였다. 그리고 호기심 차원을 넘어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공부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계기가 세이카에게 왔다. 1590년 조선통신사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일행이 교토에 왔을 때 세이카가 사절단을 만난 것이다. 이때 그는 서장관 허성과 접촉하면서 조선유학에 대하여 감명을 받았다.
당시에 세이카는 ‘장자’ 외편 '달생'편의 한 구절을 원용하여 호를 시립자 柴立子라 불렀다. 이에 허성은 세이카에게 ‘시립자설 柴立子說’을 지어 주면서 유학과 노불 老佛사상이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주11)
허성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1591년에 사츠마(薩摩 지금의 규슈)에서 명나라 사신 배에 편승하여 중국으로 유학 가려 하였지만 폭풍을 만나 실패하였다. 그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고자 했으나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세이카는 상당히 까칠한 승려였다. 159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서 세이카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주12)
이 때 세이카는 당나라 태종과 그의 신하들의 정치를 논한 <정관정요>를 강의했는데 이에야스는 그의 강의에 상당히 감명을 받았다. 나중에 이에야스는 그에게 왜경(倭京) 교토에 집을 지어주고 해마다 쌀을 2천석씩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세이카는 집도 쌀도 받지 아니하하였다.
이렇듯 후지와라 세이카는 이에야스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오직 제자인 약주소장 승준(若州少將勝俊 기노시타 가츠토시)과 좌병광통(左兵廣通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친하게 지냈다.
약주소장(若州小將) 승준(勝俊)는 와까사 노 구니 [若狹國] 고하마[小濱]의 영주(領主)인 기노시타 가츠토시[木下勝俊 1569~1649]이다. (주13)
아카마쓰 히로미치(적송광통 赤松広通:1562-1600)은 학문을 좋아한 다이묘(대명 大名)로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豊臣秀吉 1536-1598)로부터 단마 다케다성(但馬 竹田城)을 하사 받았고 관직이 좌병위독(左兵衛督)이었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히로미치를 이렇게 적고 있다.
적송광통이란 자는 이 나라 환무천황(桓武天皇)의 구대(九代)손입니다. 그는 육경(六經)(주14)을 독실히 좋아하여,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말 위에서도 늘 책을 놓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주는 좀 미욱한 편이서 일본 번역(諺譯)없이는 한 줄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세이카도 히로미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장관(將官)은 모두 다 도적들인데, 오직 광통(廣通)만이 자못 양심을 가진 자입니다. 일본은 본시 상례(喪禮)가 없었는데 광통만이 홀로 삼년상(三年喪)을 행하였고, 중국의 제도 및 조선의 예절을 독실히 좋아하며, 의복ㆍ음식 등 세세한 것에도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의 것을 본받고자 하니, 비록 일본에 살지만 일본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강항은 히로미치에게 상당한 재정적 후원을 받았고 두 사람은 돈독하였던 것 같다. (주15)
그리하여 나도 가끔 광통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는 만날 때마다 ‘밤사이 어떠하신지요? 하는 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중략) 또 그는 우리나라 선비로서 포로 신세에 있는 자와 우리 형제들에게 육경(六經)의 큰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고, 그 값으로 가만히 은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를 보조하면서 돌아가는 길에 노자에 보태 쓰라고 하였습니다. (<간양록> ’적중문견록’에서)
나. 일본주자학 경전
다음에 눈에 띄는 것은 ‘일본 주자학 경전’ 전시물이다. 여기에는 논어 · 맹자 · 중용 · 역경 · 춘추 · 근사록 · 정몽 正蒙 등 여러 필사본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책들이 바로 강항이 일본 포로생활 중에 필사한 책들이다. 이 책들은 지금 일본 국립공문서관 國立公文書館에 소장되어 있는데, 사단법인 영광내산서원 보존회에서 일본에 가서 복사해 온 것이다. (주16)
그런데 책들 바로 옆에 ‘사서의 일본 훈점 본’, ‘오경의 일본 훈점 본’이라는 설명이 있다. 이것이 바로 후지와라 세이카가 썼다는 <사서오경 왜훈 四書五經倭訓>이다.
<사서오경왜훈 四書五經倭訓>은 남송의 성리학자 주자(1130-1200 본명은 주희이다)의 ‘사서집주’에 따라 본문을 필사하여 일본식 훈을 단 논어 · 맹자 · 대학 · 중용 왜훈倭訓과, 오경대전을 기본으로 하여 필사한 시경· 서경· 역경 ·춘추 · 예기 왜훈 등 20여권이었다. (주17)
이 책이 바로 일본 최초의 주자학 텍스트였다. 이 텍스트는 일본에서 주자학적 이해를 시킨 원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만든 후지와라 세이카를 일본 주자학의 비조 鼻祖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사서오경왜훈>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세이카가 강항에게 보낸 편지가 그 단서를 제공한다.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일본에서 유학을 말하는 자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유 漢儒의 가르침을 전할 뿐이다. 아직도 송유 宋儒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 ..... 이 때문에 아카마쓰 히로미치는 나에게 지금 새롭게 사서오경의 경문을 쓰고 왜훈 방점을 덧붙여 송유 宋儒의 뜻을 후학들이 편리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라고 분부했다. 일본에서 송유의 옳음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책을 원본으로 삼을 것이다. (<등원성와집> 권지십 卷之十 문강항 問姜沆) (주18)
<사서오경왜훈>발간 작업은 다케다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가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사서오경왜훈>을 만들라는 분부로 시작되었다.
이 <사서오경왜훈> 간행에는 먼저 사서오경의 필사가 필요했는데 이 필사작업에 강항을 비롯한 10여명의 조선인 유학자가 동원되었다.
강항과 함께 수용된 여러 선비들, 즉 동래 김우정, 하동 강사준 · 강천추 · 정창세, 함양 박여즙, 태안 전시습, 무안 서경춘등이 그들이었다. (주19)
이리하여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 등 조선 선비들이 필사한 사서오경에 일본 훈점을 적었다. 즉 일본식 주석을 단 것이다.
책들이 거의 완성되자 세이카는 강항에게 이 책들의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강항은 20권에 달하는 <사서오경왜훈>의 발문을 썼다. (주20)
한편 세이카는 지금 일본 유학은 한유 漢儒의 가르침을 전할 뿐, 아직도 송유 宋儒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 책이 송유의 옳음을 깨치는 원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주21)
일본에 유학이 전해진 것은 405년경인데 백제의 왕인 박사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이것은 단지 유학 서적이 일본에 전해진 것에 불과하였다. 가마쿠라(1180-1333), 무로마치(1336-1573)시대에는 불교가 주류였고, 유학은 그 영향력이 미미하였다. 이 당시 유학은 한유 漢儒 즉 중국 한나라 시대의 훈고 訓詁 · 기송 記誦 중심이었다.
한편 무로마치 시대에는 송나라의 주자학 서적들이 유입되어 일부 승려들 사이에서 읽혀졌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지, 순수하게 주자학을 배우고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주자학이 일본에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 오고, 조선에서 약탈한 주자학 관련 서적들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그리하여 포로로 끌려온 강항과 세이카의 만남이 있었고, 세이카는 강항의 도움을 받아 <사서오경왜훈>을 발간함으로서, 송유 宋儒 즉 종래의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체계인 주자학을 일본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주22)
이러한 세이카의 열정에 대하여 강항은 아래와 같이 극찬 하였다. (주23)
세이카는 일본에서 주자가 전한 주를 배우는 유일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주자학에 대해서는 세이카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한편 세이카는 강항에게 조선의 과거 절차, 춘추(春秋)의 석전(釋奠)이며 경연(經筵)ㆍ조저(朝著)의 규정 등에 대하여도 자세히 물었다. (주24)
이렇듯 세이카는 학문으로서의 주자학만이 아니고, 주자학에 입각한 유교국가의 제도나 의식 등에 대하여도 알고 싶어 했다.
이에 대하여 강항은 초야에 묻힌 사람이라 미처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고, 단지 과거제도와 석전(釋奠)절차만 대강 알려 주었다.
그랬더니 세이카는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함이여. 또 조선에서도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하필 이런 때에 태어났단 말인가?"하였다.
그런데 이런 조선 유교제도의 실천자가 바로 히로미치였다.
히로미치는 상례(喪禮)가 없는 일본에서 홀로 삼년상을 실행하였고, 중국의 제도 및 조선의 예절을 독실히 좋아하며, 의복ㆍ음식의 세세한 절차에 있어서도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의 것을 본받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의 <오례의서(五儀儀書)>· <군학석채의목(郡學釋菜儀目)>을 얻어 보고 그의 사읍(私邑)인 단마(但馬)에다 공자묘(廟)를 세웠다. 아울러 우리나라 제복(祭服)ㆍ제관(祭冠)을 본떠 입고 틈틈이 그 부하들을 거느리고 제의(祭儀)를 익혔다. (주25)
세이카는 이렇게 유학에 신실한 히로미치에 대하여 비록 일본에 살지만 일본 사람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주26)
한편 강항을 비롯한 유학자들과 가족들 38명은 사서오경을 베껴 쓴 대가로 조선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들은 1600년 4월 2일에 후시미를 출발하여 5월1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주27)
강항의 귀국에는 세이카와 히로미치, 왜승 경안 등의 도움이 컸다. 특히 히로미치는 무사히 귀국 할 수 있도록 통행증을 얻어주고 대마도 까지 안내원과 뱃사공까지 지원하여 주었다. (주28)
다. 후지와라 세이카 - 에도 시대 유학의 개조 開祖
이어서 유뮬전시관을 이리저리 보다가, 한 쪽에 ‘후지와라 세이카’라고 제목이 붙은 판넬을 보았다. 이 전시물은 위에는 후지와라 세이카 초상화가 있고, 아래에는 “강항선생으로부터 주자학을 전수 받은 후지와라 세이카는 세이쇼 쇼다이와의 유불논쟁을 통해 새롭게 들어선 도쿠가와 막부에 주자학의 중요성을 인식 시켰고,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에 이르러 일본 주자학이 체계화되면서 일본 에도 시대는 그야말로 주자학의 시대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가 불교와 결별한 것은 1600년 9월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승리하고 교토에 왔을 때이다.
(주29) 이때 세이카는 니조성에서 세이쇼 쇼다이와 유불논쟁을 벌인 다음 불교와의 결별을 공언했다. (주30)
이 시기에 세이카는 이에야스로부터 강의요청을 받았다. 예전부터 이에야스는 주자학의 신분질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초청을 받은 세이카는 유복 儒服을 입고 이에야스를 찾았다. 이에야스는 세이카에게 잘 가르쳐 달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세이카는 강의를 시작하기 않았다. 의아해 하며 이에야스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묻자, 세이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장군님의 복장은 제 강의를 듣는 복장이 아닙니다.” 몸을 가지런히 하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당시에 이에야스는 간편복을 입고 있었다. 세이카의 말을 들은 이에야스는 옷을 정복으로 갈아입고서 세이카의 강의를 경청하였다. (주 31)
이후 이에야스는 세이카에게 에도 막부에서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이카는 이에야스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것은 1600년 10월에 자결한 아카마쓰 히로미치 때문이었다.
1600년 9월15일의 세기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서군 장수 이시다 미쓰나리(1563-1600)가 참수를 당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와 친분이 깊었던 아카마쓰 히로미치도 자결을 명받았다. 이에야스의 분노를 산 것이다. 제자이면서 후원자인 히로미치를 잃은 세이카는 통곡하였다. 세이카는 히로미치의 죽음을 애도하며 만시를 30수나 지어 영전에 바쳤다. (주32)
이후 세이카는 주자학에 열정을 불태웠다. 세이카는 “후지와라 문하(惺門)의 사천왕”이라 불리는 네 명의 수제자들, 즉 하야시 라잔(林羅山)과 마츠나가 세키고(松永尺五) · 호리교안 (堀杏庵) · 나와 가츠쇼(那波活所)와 함께 에도시대 유학을 꽃 피웠다.
세이카의 제자 중 에도 막부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이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다. 교토 오산중 하나인 겐닌지(建仁寺) 승려였던 라잔은 17세에 접한 <주자집주>에 감명을 받고 주자학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라잔은 세이카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불교에서 유학으로 기울고 있었다.
1603년에 그는 공개석상에서 주자의 새로운 주석을 붙인 <논어>를 강의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기존의 박사 집안 출신인 기요하라 히데카타는 이에야스에게 이를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학설을 선택하는 것은 학자의 자유라는 입장을 표명하여 히데카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도 유학은 이에야스의 이런 결단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주33)
1604년에 라잔은 요시다 소안의 소개로 세이카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라잔은 21세, 세이카는 43살이었다. (주34)
1605년에 라잔은 스승 후지와라 세이카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슨푸성의 서고관리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이 해에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슨푸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라잔은 히데타다, 이에미쓰(1624년), 이에츠나(1655년)로 이어지는 에도 막부에서 4대째 대학두(大學頭)로 종사하여 ‘사상계의 쇼군’이라 불렸다. 이후 하야시 집안은 라잔 -> 슌사이 -> 노부아쓰로 이어지면서 대학두를 세습하여 에도 막부의 관학을 주도하였다.
한편 세이카의 4명의 제자 중 마츠나가 세키고는 기노시타 준안(1621-1698)과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 아메리모노 호슈(1668-1755)등 막번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계보를 형성하였다. 아울러 호리 교안은 오와리 번의 유관이었고, 나와 가츠쇼는 기슈번의 유관으로 번의 유학계도 세이카의 제자들이 거의 장악하였다.
따라서 일본 사상계에서 세이카를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 開祖 또는 비조 鼻祖라 부르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에도 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무 武와 불 佛의 나라였다. 그런데 에도시대에 유 儒가 결부됨으로써 일본의 정신문화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일본 사상사에서 에도시대가 그 이전 시대와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는 무 武의 사무라이가 문 文을 읽었다는 것이다. 문文을 통하여 사무라이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었다.
에도 시대 270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사계급에서 하극상을 대신하여 군신 君臣의 도리, 더 크게 말하면 삼강오륜의 유교적 윤리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 文의 사무라이를 확립시킨 시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사상적으로 뒷받침 한 이는 바로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그리고 세이카 뒤에는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온 전라도 영광 출신 선비 강항이 있었다.
강항은 의사 醫師 요시다 이안이 저술한 <역대명의약전 歷代名醫略傳>의 서문을 써 주었다. 그리고 요시다 이안은 그의 스승인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강항을 소개하였다. (주9)
강항과 세이카가 주로 만난 곳은 강항이 객 客으로 있었던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저택이었다. (주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