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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선생창립총회를 앞 두고

풍신수길의 무덤앞에서 '조선 도둑질하려 한 도둑놈'이라 붓으로 항변한 선비정신
등록날짜 [ 2015년03월22일 13시53분 ]

본지에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전, 폴리텍대학 강릉캐퍼스학장)은 그의 칼럼 연재(1~9회)를 통해 수은 강항선생의 꿋꿋한 선비정신과 잘못된 강항선생의 내려오는 역사, 유물과 학파에 대해 다양하게 걸쳐 연구해 지난 15일에 그 대단원으로 <김세곤의 수은 강항선생> 일본주자학의 아버지 강항(9)를 게재 마감했다.

광주향교의 유교대학에 김장수선생과 함께 그 맥을 같이 하면서 역사의 오류를 바로 잡아 놓았던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노력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가치가 높은 위대한 칼럼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본지는 이 칼럼 하나로도 신문의 역할을, 충분한 소임을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공명정대하고 정론직필해야 하는 신문의 역할과 특징에서 사회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을 불러들여 사설과, 논평, 칼럼 등을 통해 역사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지적해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잊혀져 가고  있으면서 오류가 많은 유학자 중 한 분이 강항선생이었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는 그러한 일본유학의 아버지인 위대한 인물에 대한 심도있는 학문적 연구와 고증으로 다시 한 번 되찾아 가까스로 발굴을 해낸 것이다.

조선으로 부터 시호도 못 받아
박석무다산연구소이사장은 필자와 진주강씨 수은공종회장이신 재원회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강항선생보다 못한 분들도 시호를 받았는데 시호를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그러면서 '강항선생께서 영남지역에서 출생하셨더라면 이미 한일간에 위대한 인물'이 되셨을 거라고...

강지원 전18대 대통령후보였으며 변호사이고 매니페스토의 실천가인 종손은 그 말에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시호를 받지 못한 것이 더 자랑이요, 그게 그 분을 더 위대하게 하는 시금석이 되며 앞으로 더 큰그림으로 살아있는 역사가 될 것'이라고.
당시 시대상을 회상해 보면 사색당파의 싸움으로 이미 국론을 사분오열되어 있었고 노론에 의해 서인은 푸대접받던 때였다는 것!!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강대욱)가 2014년 12월 29일 고유번호증과 영광군에 등록을 필하고 비영리단체로 등록을 마쳤으며, 드디어 오는 4월 2일 수은 강항선생이 태어나셨던  영광군에서 학술워크숍과 창립총회를 갖는다고 전한다.

필자도 느낌의 감회가 깊어 창립총회 전 까진 다정도 병인양하여 매일 밤 잠 못이루고 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난,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청구영언)


선생은 일본인으로부터 해동공자로 추앙받았다.

어린 시절 다리를 주제로 지은 시의 한 구절脚到萬里 心敎脚 다리로 만리를 가지만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은 마음이다.

공께서는 이곳에서 일본 고승들에게 경전(經典)을 써주기도 하고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주는 등 유교의 진수를 일본에 전파함으로서 일본인들이 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라고 부르며 공경하였다.

1598년 교토로 이송되자 그는 일본 막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조선포로들의 석방을 촉구하였다.

十口空養 爾無所益 四年孤囚 我不如死 우리 열 식구를 공짜로 먹여주니 당신들에게 이익될 것 없고, 4년 동안 외롭게 갇힌 몸이니 나에겐 죽기보다 못하다!!

이 글이 왜적들의 마음을 움직여 1600년 공은 다른 포로 38명을 이끌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 귀국길에 교토에서 수집한 군사.지리.관직제도 등의 정보를 조정에 알리고 포로 생할의 기록들을 모아 간양록’(看洋錄)책을 쓰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고 일체의 벼슬길을 사양하고 오로지 후학들을 양성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睡隱 姜沆先生 年譜(수은 강항선생 연보)

-명종22년, 선조 즉위 원년 6월 28일 1567년 정묘(1세) : 5월 17일, 영광 불갑 유봉리에서 몽오(夢梧) 강극검공(姜克儉公)과 모친 김씨(영동)부인의 5남(해, 준, 환, 항, 영) 1녀(심우민의 처) 중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선조 4년 1570년 경오(4세) : 백형 저어당(齟齬堂) 해(瀣,1555~1591)<이이 율곡 문인>로부터 사서오경을 익히다.

 * 齟 어긋날 저 齬어긋날 어/해(齟齬堂) 瀣 濬(회은) 渙(퇴은) 沆(수은) 泳(시시당) (沈禹民)과 결혼.

-선조 5년 1571년 신미(5세) : 전라감사 신응시가 각(脚)자로 작문 운을 주자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이라고 응답하자 모두 탄복하였다.

* 신응시(辛應時 1532~1585 백인걸의 문인)

-선조 7년 1573년 계유(7세) : 『맹자 1질』을 한나절에 一覽珍技하고 모두 암송함에 책장수가 천재라 탄복하고 『맹자 1질』을 그냥 주자 사양하니 안맹마을 정자의 나무에 걸어 놓고 떠나 『맹자 정』이라 함. 현재 불갑면 소재지에 맹자정기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 근처를 <맹자마을>이라 칭함.(안맹마을의 탄생)

-선조 8년 1574년 갑술(8세) : 중국고서인 『通鑑綱目』을 하룻밤 새에 통달하여 고창군 아산면 칠암(칠암마을)고을에 綱目村(강목마을)이 생겨나고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음. 1574년에『통감강목(通鑑綱目)』을 통달하였기로 “무장(茂長) 칠암마을을 강목촌(綱目村)이 있다” 하였다.

* 무장=전북 고창의 옛 지명

-선조 9년 1575년 을해(9세) :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었다.

  (어릴 때 습성을 익혀두면 천성과 같이 된다는 내용)

-선조 10년 1576년(10세) :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 들어가 예와 경학을 터득하다.

-선조 14년 1580년 경진(14세) : 모친 상을 당하여 禮(예)를 갖춰 정성 다하다. 

-선조 17년 1583년(17세) : 母親喪(모친상)을 마치고 책문(策文)으로 향시(鄕試)에 합격(초시)하다.

-선조 21년 1587년 정해(21세) : 진사시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하다.

-선조 22년 1588년 무자(22세) :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관례를 하고 참봉(參奉) 김봉(金琫)의 딸 전주김씨와 혼인하다.

-선조 25년 1591년 신묘(25세) : 백형 저어당이 신묘사화로 화를 당하다.

-선조 26년 1592년 임진(26세)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워 군량과 군기를 모아 의병장 제봉 고경명에게 보내다. 영광 임진 수성활동에 장문서로 참여하고 의병 활동하다.

-선조 27년 1593년 계사(27세) : 광해군이 진주의 분조(分朝)에서 시행한 정시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다.<김신국, 김홍우, 이진선 등 9명이 뽑히다. 소금과 절인고기 등 어염을 유통하고 백미 100석을 모아 사촌 동생 만은공 姜낙으로 하여금 고경명, 김천일, 최경장 의병소에 보내다.

-선조 28년 1594년 갑오(28세) :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교서관(校書館)에 분관되다. 우계의 문호가 쓸쓸하니 멀리 찾아가 뵙다. 겨울, 기주관(記注官)으로 경연에 입시하다.

-선조 29년 1595년 을미(29세) : 문한(文翰)을 잘 처리하여 선조의 칭찬을 받다. 성균관 박사가 되다.

-선조 30년 1596년 병신(30세) : 성균관 전적이 되다. 가을에 병조, 공조좌랑을 거쳐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다.

-선조 31년 1597년 정유(31세) : 이른 봄, 휴가를 얻어 귀근하다가 5월에 분호조 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에 임명됨. 여름,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을 모집해 남원(南原)성에 지원갔으나 왜군에 의해 함락 당하자 불가피하게 영광(靈光)으로 되돌아오다. 영광(靈光)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다. 왜적이 영광(靈光)으로 들어와 도륙질을 하자 식솔들과 함께 2척의 배로 서해바다로 나가다. 종형 홍과 협을 만나 선상에서 회의를 갖고 이순신장군 휘하로 들어가려다가 염산 논잠포에서 9월 23일 被擄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다.

이 때 아들 용과, 딸 애생이, 그리고 조카 등 어린아이들 6명 중 4명을 바다에 수장당하고 1명의 조카아이마져 왜의 땅에서 병으로 잃게 되다.

-선조 32년 1598년 무술(32세) : 5월, 배를 빌려 탈출하던 도중 판도현(板島縣)을 지나다가 성문(城門)에 조선 침략을 비난하며 죽은 풍신수길을 향한 격문을 써 붙이다. 3일 만에 좌도(佐渡)의 부하에게 붙잡혀 대진성(大津城)으로 되돌아 오다. 왜승 호인(好人)에게서 일본의 방여(方輿), 직관(職官)을 묻고 좌도가(佐渡家)에 소장되어 있던 <왜국지도(倭國地圖)>를 베끼어 기록해 두고, 아울러 적정(敵情)과 방략(方畧)을 적어 김석복(蔚山人, 金石福)에게 조정에 소를 올려주도록 부탁하다. 6월, 대판성(大阪城)으로 옮기다. 7월, 대판(大阪)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새 도읍지인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기다.

-선조 33년 1599년 기해(33세) : <적중봉서>를 중국(명나라)의 차관 왕건공(王建功)과 신정남에게 초소(草疏)를 주어 본조(本朝)에 보내게 하다. 피노 중 『姜沆彙抄』 16종 21책을 필사하여 왜승 순수좌(藤原惺窩,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아까마쓰 히로미치에게 조선 주자학을 전수하다. 『姜沆彙抄』의 일부분인 사서오경을 포함해 16종 21책을 필사해 발문하다.

-선조 34년 1600년 경자(34세) : 봄, 좌도(도도다카도라 佐渡)에게 귀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 왜승 경안(慶安)이 극력히 권하여 허락을 받아 대마도를 거쳐 거제도 장문포(장목)로 38명을 쇄환해 5월 19일 귀국하게 된다. 선조의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과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를 올리다. 당시 등용을 조정에서 권했으나 스스로 罪人이라 칭하고 9월  말 한 필을 하사받고 고향 영광(靈光)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고 후학양성에만 힘쓰다. 『巾車錄』을 완성하다.

-선조 35년 1601년 신축(35세) : 좌의정 이덕형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여 왜(倭)의 사정을 묻자 예부절왜서(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가을에 운제마을로 거처를 옮겨 후학양성을 위해 <운제 서당>을 열고 강학을 시작하다.

-선조 36년 1602년 임인(36세) : 대구향교 교수(敎授)에 서용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다시 영광으로 내려 오다.

-선조 37년 1603년 (37세) : 『綱鑑會要』17권 30책을 완성하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강항(姜沆) 엮음. 주희(朱熹)가 지은 강목(綱目)을 보완하여 엮은 책이다.

-선조 39년 1605년 (39세) : <불갑사 중수문>을 지었으며, 문선찬주 권선문을 완성하다.

-선조 40년 1606년 병인(40세) : 회답사 여우길回答使 呂祐吉이 일본에서 돌아와 倭人들이 수은 강항선생의 충의와 절개를 칭송한다며(중국의 소무나 문천상 같다고 칭송한다)東槎錄에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북인(北人)들이 꺼리어 하며 등용하지 않다. <여우길의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음> 1606년에 <김천일장군 행장>도 지었다.

-선조 42년 1608년 무신(42세) :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선조가 승하하자 방상(方喪) 3년을 입고 동양 최대의 장편 시 <원가행(怨歌行)>을 지어 조상하다.

-광해군 2년 1610년 경술(44세) : 팔송 윤황(尹煌)이 영광군수로 부임한 뒤 아들 윤순거(尹舜擧)형제를 보내 수학(受學)하게 하다. 1610년에 광주향교 중건 상량문을 지었다.

-광해군 4년 1612년 임자(46세) : 절강총병이 조선의 경전지방에 왜인이 잡서(雜棲)한다 해 지휘사 황분이 왔는데 이를 변무하다. 1612년에 무안 <화설당 기문>을 지었다.

-광해군 7년 1615년 경술(49세) : 부친 몽오공(夢梧公)극검이 상을 당하여 형제들과 3년 시묘살이에 들어가다.

-광해군 10년 1618년 무오(52세) : 5월 6일, 병으로 졸하다. 11월, 불갑산(佛甲山)에 장사지내다. 일주일도 안 되어 이조이 부인 복띠로 자진하다.(영광군지 참조)


------------ 강항의 사후 강항과 관련된 일들 ----------------------


-인조 6년 1628년 무진 : 문인 동토 윤순거가 행장을 짓다. 

-인조 11년 1633년 : 함평이씨 이조이 부인 계유년 정려문을 받다. 함평이씨 명정

-인조 13년 1635년 을해 : 불갑 유봉마을에 사우를 짓고 우암 송시열 축문을 지었다.

-인조 14년 1636년 병자 : 유봉리 사우가 실화로 재가 되어 이에 판서 임담, 사성 김지수, 참봉 김우급 등이 발의하여 불갑면 용산마을에 사우를 신축하여 <용계사>라 하고 액호를 우암 송시열 이 편액을 쓰다.

-효종 7년 1656년 병신 : 시남 유개가 『看羊錄』서문을 지었다.

-효종 9년 1658년 무술 : 『睡隱集』완성 (우암 송시열 서문 )통정대부 승정원 승지로 증직되다. 문인 윤순거(尹舜擧)가 문집(文集) 『看羊錄』을 목판으로 간행하다.(宋時烈의 序)

-현종(顯宗) 8년 1667년 정미 : 선생의『綱鑑會要』장판이 아들 시만(時萬)이 간행하여 조성되다. 『綱鑑會要』17권이 간행되다. 청강 이제신은 조광조로 부터 성수침, 우계 성혼으로 이어지는 학맥으로 청강 이제신의 외손 정시수(鄭時遂)(1605-1685), 정시대(鄭時大) (1615-?) 형제가 영광 및 영암군수로 각각 부임하자 영광군수가 이를 간판(刊版), 『綱鑑會要』판각 동토 윤순거(尹舜擧 序) 쓰다. 

-현종 9년 1668년 무신 : 경연 연석(筵席)에서 이단하(李端夏)의 요청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추증(追贈)하라고 명하다. 참의에 추증됨 .(<현종개수실록 >권 19, 현종 9 년 4 월 13 일 )

-숙종 8년 1682년 임술 : 동토 윤순거를 용계사에 추배함. 조정에서 수은선생 절의가 한나라 소무와 같다고 하여 “금소무(今蘇武)”로 정시 시험문제를 삼아 인재를 뽑고 사손 익(翊)을 주관사정에 제수하다.

- 1702 년 (숙종 28) 용계사 중수 (군수 윤일복이 기문을 지음 )용계사 사액소를 올림 (權輔德)

-숙종 35년 1709년 기축 : <용계사> 사액을 청하자 권보덕이 제소(製疏)하다.

-영조 48년 1772년 임진 : 영조 임금이『睡隱集』을 예람하시고 선생의 절의를 한나라 소무, 송나라 문천상에 비하여 칭찬하고 7세손 재윤을 도사로 등용하다. 7세손 姜載潤 都事로 등용

-정조 22년 1798년 무오 : 『看羊錄』중 <산성이설지사>로 試題 삼음. 성담 송환기가 묘갈명을 짓다.

-고종 5년 1868년 무진 : 후손 강란수(姜蘭秀)가『睡隱文集』을 활자로 중간하다.(姜蘭秀, 姜日會의 跋)

-고종 19년 1882년 임오 : 6월 2일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하다. 대제학 김상헌이 시장을 찬하다. 시장 (諡狀 )지음(대제학 김상현) 

-고종 37년 1900년 경자 : 광무4년 6월 10일 지중추원사 강항에 치제하다.

-일제강점기 1917년 정사 : 11대손 강대학(姜大學)이『睡隱集』속집(續集)을 

간행하다.

-일제강점기 1940년대 :『睡隱文集』과 『看羊錄』의 장판(藏板)은 수면래(水面來) 선생의 강당에 보관 중이었는데 왜정 말기에 왜인 영광경찰서장의 손에 의해 소각되고『看羊錄』도 왜인 경찰서장의 손에 몰수당해 소각되어 분서(焚書)의 화를 당하였다.

-단기 4285년 1952년 : 현암 이을호 선생이『看羊錄』국역본 초판을 간행하다.

-단기 4291년, 1958년 강항의 기념관 <수은정(睡隱亭)>을 창건하다.

-단기 4313년, 1980년 :『看羊錄』국역 4판이 발행되다.

-단기 4316년, 1983년 癸亥(계해) 五月(오월)(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謹竪(근수) / 創立(창립) 

초대회장 李乙浩 國立光州博物館長 哲學博士 謹撰 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鄭埰均 謹書

이사 강대직(직손), 강종원(호남유림), 조남식(한학자), 김인곤(광주경상전문대학장), 이백순(한학자), 강대련(공무원), 전남도청 문화재위원 김희태(간사)주축.

 -단기 4317년 1984년 :『看羊錄』국역 5판(養英閣출판사).『看羊錄』(조선유자의 일본역류기 일역판, 박종홍 역주, 동양문고 평범사)

-단기 4321년 1988년 :『睡隱集』간행. 송언종 전남도지사 이을호 광주박물관장, 이백순 한학자가 도움주다. 

-단기 4330년 1997년 : 영광청년회의소 학술세미나 수은 강항 문화유산 한 일 심포지엄 

-  강항 선생의 업적 재조명(일본유적지 기행) 

-단기 4334년 2001년 : 문화관광부, 3월 이달의 인물로 수은 강항이 선정되다.

-단기 4335년 2002년 :영광 jc 와 일본 오즈 jc 교류행사(학술세미나)

 수은강항선생 - kbs 역사스페셜에서 조명, 일본과 국제교류 오즈시장 영광방문, 강항 선생 동상 제막 


-단기 4342년 2009년 :일본 오즈시장 영광 내산서원 방문,  

강항 선생 얼 기리기 위한 문화교류 희망 강항문화제 양일걸쳐 불갑 내산서원과 불갑사 

관광지구 영광 청년회의소의 주관 ‘영광 내산서원 수은 강항 문화제’ 개최.


-단기 4343년 2010년 :일본 오즈고 5월 영광으로 수학여행  

강항 선생 유적지 방문․ 해룡고와 교류 

 정병선 영광청년회의소 회장 수은 강항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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