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포럼>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과대학, ‘의학교’
우리나라 의사, 많은 편일까 적은 편일까?
국제적으로 우리나라는 의사가 많은 편일까, 적은 편일까? 이런 경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가 도움이 된다. OECD는 회원국 정부들의 보고를 취합해서 인구 1천 명 당 활동 의사 수를 국가별로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34개 회원국 평균은 3.2명, 한국은 2.2명이다. 한국보다도 의사가 적은 OECD 국가로는 칠레와 터키가 있을 뿐이다. ‘적정 의사 수’를 산출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국가마다 계산 조건이나 고려할 점이 다르기도 하고, 또 의사 수를 늘린다고 환자에게 좋은 것만도 아니다. 어떻든 틀림없는 사실은 한국은 선진국 중에서 의사가 매우 적은 편이며(증가속도는 가장 빠르다), 지난 20년 가까이 의대 신설 및 의학생 증원 억제라는 의사단체의 요구가 충실히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70년 전인 해방 무렵에 의사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38선 이남 지역에 대략 2천 명, 이북에 1천 명가량의 의사가 있었다. 당시 인구가 각각 2천만 명과 1천만 명쯤 되었으니 남북 공히 인구 1천 명 당 의사 수는 0.1명이었다. 의사 1명에 인구 1만 명. 의사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700년이 아니라 70년 전 이야기이다. 같은 일제식민지라도 대만은 상대적으로 나아서 인구 1천 명 당 의사 수가 0.3명 정도였으며 일본 본토는 거의 1명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일제는 그 정도나마 의사가 배출된 것도 자신들의 은공이라고 강변했다. 한국인들에게는 근대식 의사를 교육하고 양성할 역량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근대의료를 직접 접하게 된 것은 대체로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나라 문을 열면서부터이다. 초기에는 이재하, 이현유, 지석영, 최창진 등 민간인들이 우두를 시술하기 시작했다. 우두 하면 지석영을 떠올리지만, 그 혼자만의 공은 결코 아니었다. 그만큼 좁게는 우두, 넓게는 근대의료의 도입이 당시 대세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는 일본에 20여년 뒤졌지만, 일본보다 독자적인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참살당한 홍영식·김홍집의 집에 한국 의료 역사가
1885년은 한국 근대의료사에서 의미가 큰 해이다. 민간 차원에서 보급되던 우두가 국책사업으로 확대되었으며,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설립된 것이다. 그 전해 발발한 갑신정변으로 반동적인 분위기가 농후한 가운데 근대의료 도입을 향해 정부가 성큼 발을 내디딘 것은 그만큼 그것이 절실했음을 뜻한다. 국가가 제중원을 설립한 데에는 백성들을 진료하는 목적과 더불어 근대식 의사들을 양성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그에 따라 ‘제중원 학당’을 설치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근대의료를 안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필수적인 일이 일단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 뒤 1895년 을미개혁기 김홍집 정부에 의해 의사교육기관 설립이 성사 직전에 이르렀지만 아관파천으로 다시 좌절을 맛본다. 이때까지의 과정이 권력층 주도였다면 이후로는 민중들에 의한 상향식 노력이 전개된다. 그리고 마침내 1899년 최초의 근대식 국립의과대학인 ‘의학교’가 설립된다. 의학교는 시도로만 끝났던 1880년대의 제중원 학당과는 달리 1902년 최초의 근대식 면허의사 19명을 탄생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두 차례에 걸쳐 17명의 졸업생을 더 배출한 의학교는 1907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의료 장악과 일본인 진료를 위해 세운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이토가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내쫓고 한국군대도 해산했던 그 해이다. 오늘(3월 24일)은 116년 전 〈의학교 관제>가 반포된 뜻깊은 날이다. 의학교는 재동 네거리 남서쪽에 있던 김홍집의 몰수된 유택에 세워졌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고종의 배신으로 자신이 계획했던 의학교의 설립을 눈앞에 둔 채 참살당했는데, 죽어서 소원을 풀었다. 갑신정변 때 참혹하게 죽은 급진 개화파 영수 홍영식의 집에 제중원이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