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산책>작은 늪의 개구리
절의 굴착기에 황천객이 된 늪 속 생령들
주민들은 분노와 작은 슬픔, 서운함으로 절의 횡포에 분개하며 말을 옮겼다. 그런데 그 옮겨진 말에 의하면 그 작은 늪 부분은 절의 땅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더더욱 분개했다. 여론에 밀려 구청은 복원을 명령했다. 절에서는 할 수 없이 황토를 약간 걷어내고 다시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서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날 리 없었다. 해를 넘겨 봄이 되었다. 작은 늪이 있던 자리에 물이 약간 고였다. 그곳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지났지만, 살아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런 황토만 뻔뻔스러운 얼굴을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2월 말의 잔뜩 흐린 날, 그곳을 지나는데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반가운 마음에 작은 늪 자리로 갔지만 살아 있는 것은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부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소리의 근원은 묘연했다. 약수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다시 두리번거리고 있노라니, 어떤 사람이 웃으며 저기서 나는 소리라면서 한 곳을 가리켰다. 길바닥 아래 깊이 묻은 하수관로였다. 하수관로가 지나는 곳 군데군데에 수직으로 구멍을 뚫고 쇠 그물을 쳐서 덮어놓은 곳이었다. 하수관이 막힐 경우 사람이 들어갈 구멍이었다. 소리는 바로 그 구멍에서 나오고 있었다. 봄이 오자 산란처를 잃은 개구리 몇이 하수관로 안으로 들어가 짝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가 오면 그들이 낳은 알들은 빗물에 쓸려 사라질 것이 빤했다. 이 생각에 집에 돌아와서도 짠한 마음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 뒤 작은 늪 자리를 다시 지나는데, 군데군데 개구리 알이 보였다. 소문을 들었더니 누가 쇠 그물을 벗기고 들어가 개구리 알을 건져내어 옮긴 것이라고 하였다. 작은 늪 바로 건너편(폭 4미터 정도 되는 도로 맞은편이다)에 구청에서 만든 ‘○○생태관찰센터’란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 센터로부터 250미터쯤 올라가면 역시 구청에서 돈을 들여 길옆에 연못을 파고 중간에 돌을 하나 세워 놓았다. 하지만 연못은 텅 비어 있다. 연못에서 다시 200미터쯤 올라가면 문제의 그 절이 있다. 절에서는 매일 종소리가 울린다.
분하고 슬프고 서운한 주민들 마음에 생명이
나라에서 돈을 들여 생태관찰센터를 짓는 것은 친환경적인, 생태학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아마도 그 이면에는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연못을 파서 무언가 물에서 살 만한 생명들이 와서 제 집 삼으라 한 것일 터이다. 불교는 살생을 금한다. 종소리, 그리고 목어소리는 말을 못하는 짐승들도 진리를 알아들으라는 것일 터이다. 생명에 대한 한없는 자비심의 발로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생태관찰센터 바로 앞에서 스님은 주민들이, 아이들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생명의 움이라고 할 곳을 그냥 무덤덤한 마음으로 묻어버린다. 나는 이 일을 크게 확대 해석하고 싶지 않다. 단 하나 다른 생명에 대한 배려의 가능성이 있다면, 이 시대의 관이나 국가, 혹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늪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분개하고 슬퍼하고 서운해했던 평범한 주민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마음을 확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환경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봄날 작은 늪 자리를 지나며 문득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