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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정기(水月亭記)의 원작자는 누구일까?

등록날짜 [ 2015년07월08일 20시21분 ]

                                                            

  광양 매화마을 섬진강가에 수월정(水月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광양출신으로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1547~ 미상)이 이곳에서 노후를 지낼 생각으로 정자를 짓고 이름을 수월정이라 했다한다. 수월정의 안내문에 의하면 ‘경치의 아름다움에 반한 송강 정철은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지어 칭송하여 노래했고, 선조 때 형조좌랑을 지낸 수은 강항 또한 ’수월정 30영(詠)‘이란 시조를 지어 노래할 정도로 아름다운 정자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송강 정철(1536~1593)이 지었다고 하는 수월정기(水月亭記)가 수은 강항(1564~1618)의 수은집(睡隱集)에도 강항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는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결과 송강집 속권 2권(잡저)에 실린 수월정기와 수은집 3권(기)에 실린 수월정기는 글자 몇 자만 다를 뿐 내용이 같아 한 사람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의 수월정기가 두 분의 문집에 나란히 실릴 수 있었을까? 과연 원작자는 누구일까? 요즘 국내 유명 소설가의 표절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데 조선시대에도 표절이 있었을까?

  먼저 수월정을 세운 정설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정설은 1547년생으로 송강 정철보다는 11세가 적고, 수은 강항보다는 17세가 더 많았다. 정설은 30세 되던 해인 15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나주목사를 지내고 선친이 지내시던 광양으로 귀향한다.

  수월정 안내판에는 수월정을 정설이 1573년에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송강의 수월정기의 내용 중에 「前錦牧光山後人鄭侯渫。年五十而棄於世也。遂求先大夫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 - 전 나주목사 광산후인 정설이 나이 50에 속세를 떠나, 부친 옥천선생의 별업을 광양에서 따르기로 했다.」라고 되어 있어 정설이 나주목사를 지내고 광양에 내려 온 후에 송강이 수월정기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정설이 나주 목사를 언제 지냈을까? 나주군지에서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을 찾아보았다. 정설은 1598년 1월에 부임하여 그해 5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정설의 나이 51세 때 5개월 동안 나주목사를 역임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내용으로 보아 수월정기를 송강 정철이 지었다는 것은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것은 송강 정철이 1594년 2월7일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정설이 나주목사에 부임하기 4년 전이나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미 죽은 사람이 몇 년 후의 사실을 담아 정기를 쓴단 말인가?

  그리고 또 하나, 수월정기의 끝부분을 보면 「兵火十年。文物一空。而水月則依舊也-전쟁 10년 동안에 문물은 모두 사라지고 없으나, 수월정은 의구하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병화10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전에는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그러한 전쟁을 겪은 분이라 할 수 있다. 송강은 당쟁에 휘말려 유배와 낙향은 했었지만 전쟁은 겪어보지 않았다. 송강은 임진왜란 중에 타계했으므로 여기에서도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다시 정리해 보면 정설이 광양으로 귀향한 시기는 나주목사를 마친 51세 때(1598년) 무렵이며, 수월정기가 지어진 시기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십년병화)이 끝난 이후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송강이 수월정기를 지었다는 것은 송강의 나이로 보아 시간적으로 부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 송강 사후에 일어난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월정기의 원작자는 수은 강항으로 귀결 된다.

 수은 강항은 임진왜란 시 영광수성을 위한 의병활동과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성 전투의 양곡수송을 맡았으며, 정유재란시 왜국에 피납되어 1600년 5월에 귀환했다. 따라서 수월정기의 내용과 같이 정설이 나주목사를 지내고 귀향한 이후이며, 10년 전쟁(병화)를 겪었다는 내용도 수월정기와 무두 일치한다.

 그러면 어떻게 수은 강항의 수월정기가 송강집에 실리게 되었을까? 예단할 수는 없으나 송강집을 편찬할 때 송강을 추종한 후학들 중에 누군가가  수은의 수월정기를 송강의 작품으로 착각하여  몇 자 가필하여 끼워 넣은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후학들로 인하여 송강마저 표절로 욕되게 하니 씁쓸하다.

                                                  <참고자료>

                    水月亭記 (수은 강항)- 수은집 권 3 - (記)
士大夫之進不得有爲於斯世。棄位而巷處者。必謀明山麗水之濱。池館苑囿之樂。一以爲淸閑寂寞之娛。一以抒憂時戀闕之懷。六一翁之於穎上。杜祁國之於睢陽。皆是已。①前牧使光州鄭侯。年五十而棄於時。遂求先大夫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距先廬十里許而居之。選勝爲亭。以水月爲名焉。余觀夫南方之山。巍然高者以千數。而白雲爲最奇。南方之水。可行舟者以十數。而蟾江爲最大。以白雲之東麓爲屋山。而以蟾江之上流置屋下。則勝絶有不暇論也。而況天下之三神山。方丈居其一。煙火食人之生世間。聞方丈之名者亦罕矣。其於起居飮食。早夜相對者。何如哉。左嶺右湖。控引島蠻。商舡之所走集。市賈之所輻湊。岳陽朝嵐。鶴洞暮煙。躑躅成山。火雲成峯。霜落而千林紅。氷塞而長河白。千態萬狀。畢集於几席之下。則此水月之所以選勝也。②兵火十年。文物一空。而水月則依舊也。世降俗末。人心不古。而水月則猶前也。市道日巧。一錢俱湧。而水月則無價也。棄枯集菀。門雀可羅。而水月則不遐也。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浮光躍金。靜影沈壁。水得月而益淸。月得水而益白。直與侯之胸采。上下乎同符。則此水月之所以得名也。余雖不獲登公之亭。而幸嘗竊誦公之歌。見公之書。已得水月之大槩。而若公之心則余固知之。於是乎書。  


                  水月亭記 (송강 鄭澈) - 송강집 속집 권2- 雜著
士大夫之進不得有爲於斯世。棄位而巷處者。必占名山麗水之濱。池館園囿之樂。一以爲淸閒寂寞之娛。一以敍憂時戀闕之情。歐陽公之上。杜祁公之睢陽。皆是已。前錦牧光山後人鄭侯渫。年五十而棄於世也。遂求先大夫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距先廬四十里而居之。選勝築亭。名曰水月。余觀夫南方之山。嵬然高者以千數。而白雲爲最奇。南方之水可勝舟者以千數。而蟾江爲最大。以白雲之東麓爲屋上。而以蟾江之上流置屋下。則形勝有不可論也。而況天下之三神山。方丈居其一。煙火食者之生世間。聞此山之名者亦罕矣。其於起居飮食。早夜相對。爲如何哉。左嶺右湖。控引島巒。來船去舳。雲飛而鳥逝。官津野墟。魚鱗輻湊。渭川千畝。鄴水朱華。鶴洞朝嵐。岳陽暮煙。躑躅成山。火雲成峯。霜落而千林紅。氷塞而長川白。千態萬象。畢集几房之下。則水月之所以選勝也。兵火十年。文物一空。而水月則依舊也。世降俗末。人心不古。而水月則猶昔也。市道日巧。一錢且涌。而水月則無價也。棄枯集菀。門雀可羅。而水月則不遐也。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浮光躍金。靜影沈璧。而水得月而益淸。月得水而益白。直與侯之胸次。瑩澈同符焉。則水月之所以命名也。余雖不獲登侯之亭。誦侯之歌。見侯之書。粗得水月之萬一。而若侯之方寸。則余固知已。故於是乎書。辛 缺 秋旣望。烏川鄭某。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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