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以式 大將軍 一代記(일대기)
1. 머리말
2. 강이식 장군은 누구인가?
3. 임유관 전쟁
(1) 高․隨 전쟁의 원인
(2) 강이식 장군의 북벌 주장
(3) 임유관 전쟁
4. 살수 전쟁
(1) 高․隨 제2차 전쟁의 원인
(2) 수 양제의 침략
5. 제3차 高․隨 전쟁
6. 제4차 高․隨 전쟁과 隨의 멸망
7. 맺는 말
1. 머리말
한국사란 무엇인가? 9천 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 민족흥망성쇠의 기록이다. 역사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역사적 사실(Fact)의 존재와 그 사건의 기록(Writing)으로 엮어져 있다. 역사의 기록과 구성에는 민족정기를 이어가는 타당한 해석이 있어야 바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에 고구려가 요동(遼東)의 지배와 더불어 전사(戰史)에 남을 사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잊혀져 있다면 그것은 그 민족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대부분 수서(隨書), 신구(新舊) 당서(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등 중국 측의 사서 내용들을 초록하였으니 어찌 자주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장구한 고대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 없는 우리와는 달리 자신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쟁대상인 나라에 대한 기록까지 갖고 있는 중국 측 사서(史書)를 보면서 한·중의 고대사를 철저하게 다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나 민족의 흥망성쇠는 있다. 승리자가 무조건 자가당착이나 춘추필법으로 지난 역사를 곡해하고 반역사적 사실을 기록한다면 그 어떤 경우라도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송도를 지나다가 만월대를 쳐다보라.
반쪽짜리 기와인들 남아 있는가? 아, 슬프다. 만월대는 고려조의 궁궐이다. 무슨 병화에 탔다는 전설도 없는데 어찌 이같이 무정한 유허만 남았는가.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을 수 없고, 평양에서는 고구려의 구형을 볼 수 없는 실정이다. 후에 일어난 왕조가 앞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고 불살라 없애 버리는 과오를 범했다.
신라가 흥하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역사가, 조선이 일어나자 고려의 역사가 제대로 전승 되지 못하고, 언제나 현재로써 과거를 계속하려 하지 않고 천박한 사관으로 지난 역사를 말살하려고만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재료가 빈약하게 된 것이다. 정복전쟁이나 합병의 승리자가 역사 전통의 타당성을 수용하고 올바로 해석할 수 있을 때 역사 전승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승리자는 통상 정치 세력이나 집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역사 전통과 그 타당성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있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민족의 역사로서 영원히 추앙되고 귀감이 되고 있지 않는가?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 굴하지 않고 백척간두에 우뚝 서서 국난을 극복한 민족의 영웅 강이식 장군도 고구려의 멸망으로, 기록의 누락으로 잊혀진 장군이 된 역사민멸(歷史泯滅)의 피해자이다.
참담한 마음으로 반드시 끊임없는 역사 천작(穿酌)과 탐구를 통하여 잃어버린 역사를 회복해야만 한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전쟁이 빈번했는데 그 중에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고구려가 隋의 문제와 양제, 唐 태종과 치른 전쟁을 들 수 있다.
수·당과 수차례 치른 전쟁 중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고구려가 승리한 전쟁 중에 수나라 양제의 백만 대군을 격파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과 당나라 태종과 싸운 연개소문이나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수 문제를 대패시킨 병마원수 강이식 장군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이유는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이 긴자만의 기록이아니라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닌 진실의 탐구이자 사실의 기록이여야 한다면 고구려 영양왕 때 위대한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 장군에 대한 업적은 당연히 복원되고 선양되어야 할 것이다.
6세기와 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면, 신라 진흥왕이 북진정책을 폈다. 백제는 5세기 말~6세기 중반까지 동성왕, 무령왕과 성왕으로 이어지는 중흥기를 지나고 있는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3세기 이래로 후한(後漢:25년∼220년)이 멸망하고 220년∼589년까지 16국 시대, 위진 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를 거치며 30여개 이르는 군소국가가 명멸해 가는 동안 고구려는 수세기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며 그 당시까지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동아시아 최대강국으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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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자치통감:1084년에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찬술. 유반(劉攽) · 유서(劉恕) · 범조우(范祖禹) 등이 편찬을 도왔다. 전 294권. 고이(考異)와 목록(目錄)이 각 30권. 편년체(編年體)의 사서(史書). 주(周) 위열왕(威烈王) 23년(B.C.403)부터 후주(後周) 세종(世宗) 현덕(顯德) 6년(959)까지의 일을 기록했다. 내용은 정치 · 군사를 위주로 되어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1,362년 동안의 역사적인 사실을 총괄하고 있다. 고대에서 당나라 말까지를 그린 역사서로 ‘제왕 학의 책’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통사(通史)’라 했으나, 저자 사마광이 신종에게 이 책을 진상하자, 신종이 정치에 관한 참고서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에서 "정치상의 참고에 이바지하는 치정(治政)의 거울"이라는 의미가 담긴 ‘자치통감’이라는 명칭을 하사, 그 후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풍부한 자료를 고증해 지은 책이라 처음부터 명저로 높이 평가받았다. 모두 16기(紀) 전 29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2, 강이식 장군은 누구인가?
강이식(姜以式, 550~?)은 진주 강 씨의 시조로 고구려 영양왕 때의 장군이다. 일부 학자들은 강이식장군을 수나라 귀화인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장군은 고구려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통 고구려인으로 고구려 서해변의 점선현(西海邊의黏蟬縣: 현(現) 평안남도(平安南道) 용강군(龍岡郡) 귀성면(貴城面))이 고향.)사람이다. 그의 친부는 강철상으로 고구려 제24대 양원왕(陽原王:서기 545년-558년)때 상서원에서 시랑 벼슬을 지냈다.
민속학자이자 사학가인 강무학의 저서 성장(聖長) 을지문덕에 의하면 장군은 부친은 바로 그 때 돌궐(突厥)에서 수나라의 사주(使嗾)를 받고 고구려에 침입하자 강철상은 서부총관부 장군으로 자원 출정하여 무공을 세운 분이라고 금석문에 의거 고증하였다. 그 후 은퇴하여 서해변의 점선현 고향땅으로 돌아와 여생을 즐겼는데 불혹을 훨씬 넘겨 자식을 하나 얻어 이름을 강이식이라 이름 지었다.
점선현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서해 가운데 위치하여 조수가 되면 사면이 바닷물이 잠기고 석수가 되면 삼면 육로가 되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 청해도인이 살고 있었다.
강철상 시랑은 문무가 겸전한 분으로 청해도인을 청하여 아들 이식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 나이 열 살 때, 능히 말을 타고 달리며 총명하여 일취월장의 기상을 지닌 채 성장했다. 장군은 점점 자라나면서 풍채도 좋고 체격이 건장하며, 기력이 장대하였다. 15세 때는 구십 척의 철퇴를 능히 마상에서 구사하고 진법을 이루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으며. 서기 573년(평안왕 15년) 24세 때에 동명 대회에서 장원한 준재이기도하다. 따라서 강이식장군은 서기 550년에 태어났다고 추리된다. 이식은 부친의 뜻에 따라 서부총관으로 봉직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고구려는 성주 막리지, 총관등 대부분 세습제로 가문으로 이어져온 풍습이다. 그 후 이식은 부친의 뜻을 받아 서부 총관부에서 벼슬하며 돌궐과 거란, 또 말갈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간적도 있다. 동명 대회에서 장원한 후 아직 보직을 받지 않은 을지문덕 장군이 서기 592년(고구려 영양왕 3년) 8월 하순 요동성 서부 총관부의 총관 강이식 장군을 찾아와 ‘장군님 휘하에서 일하고 싶어 왔습니다. 라고 하여 총관부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고,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으로 강이식 장군은 병마 도원수, 을지문덕 장군은 서부 총관으로 각각 승진되었다.(이 기록은 진주강씨교리공파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다.) 6세기 후반 세 나라로 분리되어 있던 중국은 북주가 북제를 정복한 뒤 새로 수나라를 세우고 창업 8년(서기 580) 만에 진나라까지도 멸망시켰다. 중국에 400년 만에 나타난 통일 왕조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질서에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이후, 세력을 확대하려는 수나라와 강국 고구려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5) 그는 소설 광개토대왕, 삼국통일, 단군, 을지문덕 등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 역사관련 저서만 해도 홍익인간과 음부경, 단군조선의 실존, 충무공 병법, 단국문화사, 향가의 기원 등이 있다. 역서인 삼국사기 신강, 삼국유사 신강 등을 포함해 총 80여 권을 책을 펴내고 있다.
지금도 스포츠나 무예 결투의 종목에서는 마지막에 승리를 쟁취한 두 사람이나 집단이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격돌한다. 마찬가지로 천하쟁탈이나 국지적 전투에서 이긴 나라들 사이에 자웅을 겨루는 것은 공리(公理)이자 정리(定理)라고 하겠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많은 종족들이 대립하고 있었으나 모두 미개하고 무지한 유목의 야만족들이었다. 그들이 한때 정치적으로 큰 세력을 갔었으나 문화가 없어 마치 뿌리 없는 나무처럼 패망이후에 다시 계속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 일정한 지역에 뿌리를 내린 토착민족으로서 장구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나라는 조선과 중국이 있었을 뿐이었다.
조선과 중국은 고대 동아시아 양대 세력 이였으므로 서로 민멸(泯滅)해야 할 숙적이 되어 전투를 감행하게 될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기원 590년경에 이르러 周 宇文氏의 황제 자리를 빼앗은 수문제 양견(楊堅)이 중국 강남 六朝중의 한나라인 陳을 병탄하고 전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강대한 제국이 된 후 중국 변방의 나라들을 무시하자, 북방의 돌궐이나 남방의 토욕혼(吐谷渾선비족 후손 모용토욕혼은 청해성 서쪽에 토욕혼 (Tuyuhun, 吐谷渾 ) 을 아름다운 청해호 서편 지금의 청해성 공화현(共和县) 지역 에 건국하고 285-317 칸으로 재위한다. 토욕혼[吐谷渾]은 4세기 초, 중국의 칭하이 지방에 티베트계 유목민이 세운 나라다. 북위가 붕괴되고 북중국이 분열되자 토욕혼은 새로이 급부상한 동돌궐제국에 봉신이 됐다. 울지라는 성은 만주, 몽고 지역에서 유목으로 살아가던 선비족의 일원인 토욕혼의 지배 계층의 성이다)은 모두 다 쇠약하여 중국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예를 취했다.
그러나 오직 고구려라는 제국이 이때 가장 강성하여 중국과 대항하니, 어찌 오만한 중국의 제왕이 참고 있을 것인가! 이것이 수나라 군대가 쳐들어온 첫 번 째 원인이 되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비봉출판사,2014.(p.391))수가 중국을 통일할 당시에 고구려는 이미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북쪽 몽고지역도 장악하고 있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이로써 고구려와 수는 동아시아 실질서 구축을 위한 위협과 패권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면서 국제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신라와 백제는 수십 년간 서로 풀지 못할 원수 사이가 되었지만, 갑자기 우리가 잘 아는 백제 서동요의 서동과 신라 공주의 결혼으로 장인과 사위의 나라로 바뀌어 서로 우호관계를 맺었다. 양국이 모두 고구려를 미워하여 사신을 수차 수에 보내 고구려 정벌을 청하였다. 이것이 수의 군대가 쳐들어온 두 번째 이유였다. (앞의 책.(p.391)) 후일 신라가 당에게 망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다년간에 걸친 고구려의 끈질긴 저항과, 연개소문의 맹렬한 진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고구려가 당이 아니라 수에 망했더라면 백제나 신라는 隨의 郡이나 懸으로 합병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옛 역사를 읽을 때 백제 신라가 수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에 대해 책을 덮고 한숨 짓는다고 신채호 선생은 탄식하였다.
1945년에도 우리가 독립이 되지않았드라면 일본 홋카이도에 이은 일본의 주로 정식 편입, 군대동원령이 아닌 징집 령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독립자존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2) 강이식 장군의 北伐 주장
기원 597년은 고구려 영양대왕8년이자 수문제가 진을 병탄하여 중국을 통일한 지 17년이 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 풍년이 계속되어 군량도 충분히 저장되고 군비도 충분해지자 수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영양왕(嬰陽王, ?~618년)은 고구려의 제26대 국왕(재위 : 590년~618년))이다. 휘는 원(元) 또는 대원(大元)으로 평원왕의 맏아들이다.)을 신하로 칭하며 수나라에 굴복하라는 오만 무례한 국서를 보냈다.
"짐(수나라 문제)이 하늘의 명을 받아 사랑으로 기름에 있어 고구려왕에게 바닷가 한 귀퉁이를 다스리도록 위임한 것은 교화(敎化)를 선양하여 모든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각자의 천성(天性)을 완수케 함이니라. 왕이 매번 사절을 보내 조공하니(다른 나라에 서신을 보내 조공이라고 쓰는 것은 중국에서는 춘추이래의 상례이다. 그러나 이 말은 史書에서만 그렇게 사용했을 뿐이고 대등한 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는 쓰지 못하는 것인데, 이제 고구려가 화를 내게 하여 한번 싸워보려고 일부러 이말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 비록 변방(藩附)의 나라라고 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 성의는 미진(未盡)하다. 고구려왕은 이미 짐의 신하이므로 짐의 덕을 닮아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왕은 말갈 사람들을 억압하고 거란사람들을 가두어서 신하나 첩으로 삼고 짐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는 자들을 방해하는 등 착한 자들이 의(義)를 흠모하는 것을 분하다고 생각하니, 어찌 이같이 주위에 해독 끼침이 심한가, 짐의 관부(太府)에는 공인(工人)들이 적지 아니하니, 만약 왕이 이들을 쓰고자 한다면 주청만 하면 얼마든지 보내 줄 텐데 왕은 지난해에 은밀히 재화를 운반하고, 백성들을 동원하고, 노수(弩手)들을 은밀히 감추어 두고, 병기를 수리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이냐?-- 고구려가 비록 토지가 협소하고 인구도 적은 나라이지만 이제 왕을 쫒아내야한다면 반드시 다른 관리를 뽑아서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친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가 되는 것이니, 굳이 다른 관리를 뽑아 보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왕은 생각해보라. 요수(遼水)가 넓다한들 장강(長江)과 비교할 것이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고 한들 진(陳)나라 병사만도 못하다. 짐이 만일 길러주고 보호해 주려고 하는 대신에 왕의 죄를 책망하고자 한다면 장수 하나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니, 수많은 병사를 보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우선 은근히 타이름으로써 왕 자신이 새로워지기를 바라노라."고(요약하면 “넒은 하늘밑은 다 짐의 신하가 되는 것이니 이제 고구려왕을 내쫒고 관리를 보내 다스리고자 한다. 그러나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행실을 바로 한다면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관리를 두겠는가.”) 하였다.
고구려 영양왕은 모욕적인 수의 글에 분개하여 조정회의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장군 강이식이 나서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회답해야 합니다.” 라고 강경하게 개전(開戰)을 주장했다. 고구려가 칼로써 대응하겠다는 회답을 보낸 이듬해(598) 수 문제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정보가 있자, 고구려 군대가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강이식은 병마원수(兵馬元師)로 고구려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을 향해 진군 하고, 먼저 예(濊)의 병사 1만 명으로써 요서(遼西)를 침범하여 수군을 유인하게하면서 거란병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을 치게 하니, 마침내 양국의 제1차 전쟁이 개시되었다.
(3) 임유관 전쟁
고구려의 공격에 수 문제는 넷째 아들 양과 공신 고경 등을 지휘관으로 수군 7만과 육군 30만 명의 대군을 편성해 대대적인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수는 북쪽의 돌궐과 고구려를 압박해 오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와 수는 상호 사신을 보내 각국의 정세와 지리를 염탐하였다. 수가 비밀리에 30만 대군을 징집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양왕은 침략야욕에 맞서 598년 요서지방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간파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有備無患의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영양왕은 수의 의도를 알아보려고 영주지방을 공격, 함락시킨 뒤 곧바로 철군했는데 수는 이것을 빌미로 대군을 출병시킨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많은 늪지대가 있었다. 지형이 험해 천연적인 장애물과 장거리 이동으로 수군은 군량을 조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수가 고구려를 정벌하기란 불리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강이식은 이러한 조건들을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수서(隋書)는 수나라 역사서로, 당 고조 이연 때부터 시작하여, 당 태종, 당 고종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완성된 총 85권의 수나라 역사 통사이다.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수가 멸망하고621년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한 후, 무덕(武德) 4년에 왕소(王劭)가 수서 18권을 완성하였다.629년 당 태종 정관 3년 당 태종의 명을 받아 방현령(房玄齡)이 수서 감수를 시작하여, 636 당 태종 10년에 위징(魏徵)과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이 감독하고, 실제 집필에는 안사고고(顔師古)와 공영달(孔穎達) 등이 참여하여 본기 5권, 열전 50권이 완성되었다. 열전 46권에 동이(東夷)를 다루고 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 유구, 왜국 순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 전투는 서기 598년 음력 6월 1일부터 임유관(임유완(臨硝關: 현 산해관의 남서 지역)에서 벌어졌다. 598년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공격했다. 고구려군은 수군 요서 총관 위충과 싸우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으로 나오니 수 문제(수문제는 외손자의 왕위를 찬탈해 황제다 된 인물이다. 황제는 본래 공덕이 없는 사람으로 천하를 편취하였다.『자치통감』수문제는 북주에서 수를 세운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새 수도를 건설했다. 그는 전국을 통일하고 국가가 번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옛 직한 대흥공을 따서 대흥성이라 명명했다. 이 성이 그 후 당의 수도 장안성이다.)는 이에 격분하여 음력 6월에 한왕 양량과 왕세적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주라후로 하여금 보급을 맡겨 수륙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수 30만 대군을 맞이한 강이식은 6만의 병력으로 고지를 점거하고 기병부대를 기동전으로 지휘하면서 수의 30만 대군을 유린했다. 임유관을 비롯한 각 전투에서 고구려 군이 방어에 임하자 수군은 포차와 석포, 쇠뇌를 이용해 맹렬한 공격을 했다. 강이식은 검차와 큰 방패를 만들어 방어하며 무술 기량이 뛰어난 군사를 백 명, 이백 명 단위로 소수 정예 조직을 만들었다. 그 조직으로 수시로 야간 기습을 감행하고 게릴라 전법을 통해 수군을 지치게 했다.
강이식은 병마원수로서 2만의 고구려 수군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수군을 발해만으로 유인하여 대규모 해전을 펼쳤다. 무려 보름 동안 전개된 해전에서 수군은 참패를 당해 살아서 도망 간 병력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발해 만에서 승리를 거두자 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임유관 공격 진입로마저도 봉쇄해 버렸다.
수는 보급로가 차단되고 군수물자까지 고구려군에게 번번이 탈취 당하자, 전의를 상실했다. 그 틈을 타 강이식은 고구려 철기 병을 부월수와 창검수로 무장한, 정교한 편대를 조직하여 맹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군의 기마기병 전술에 수 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수의 군영은 장마철이 되면서 전염병이 빠르게 퍼졌고 군량미마저 부족해 인육을 먹는 처참한 상태가 벌어졌다. 그 해 8월이 되어서야 수 문제는 후회하며 철수 명령을 내렸다. 살아서 돌아간 병력은 30만 중에서 겨우 3만 명뿐이었다. 이것이 수나라의 1차 침입이다.
고구려의 공격 목표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가장 큰 국제 시장이 형성된 요서지방의 영주였다. 이곳은 수나라가 고구려 요서의 지배권을 넘보지않게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임과 동시에 그곳을 장악한다는 것은 거대한 시장과 교역권을 확보할 수 있는 곧 세력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