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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 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구례편)

1882년 조선 말기 고종황제로부터 명정(銘旌)받은 이후 1886년 구례읍에 장절각 건립
등록날짜 [ 2021년07월16일 20시31분 ]

구례군 경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게 은어와 털 게로 유명한 섬진강지류인 압록이다. 국도 18호선을 따라가면 우리나라에서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곡성의 압록에서 출발해 가게 되고 곧이어 구례로 이어진 압록까지 섬진강 본류와 지류인 보성강이 흐르고 있다.


이 압록을 따라 잠깐 동안 하천주변으로 펼쳐진 사시사철의 경치에 취해가면 도달하는 곳이 구례군의 초입(初入)을 한자로 풀어 지칭하는 구례구역이 나온다. 거기서 구례군청 소재지까지 1킬로 남직 되는 곳에 강씨촌이 있다,


70년 근대화를 부르짖을 때 많은 농촌의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게 되어 지금은 타 성씨의 사람들이 뒤섞여 그것도 몇 가구가 안 되지만 을씨년스럽게도 강씨촌이라는 표지석 만이 반길 뿐이다.


구례에 있다는 장절각을 이 집성촌에 들러 이 잡듯이 지인을 찾아 뒤졌으나 현존하는 주민들 그 누구도 장절각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현지인들이 모르는 관계로 이번에는 구례군청 학예사를 찾아 가 본다. 그 역시 잘 몰라 이어 구례문화원을 들려 어렵게 그 당시 구례군 민주평통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강차종회장의 안내로 수은 강항선생의 장절비가 있는 장절각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찾아 갔다.

구례군 문화재, 수은강항의 장절각

구례군청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다. 마을도로를 따라 2~3분 가다보면 구례향교가 왼쪽에 위치하고 있고 멀리에 보이는 고속도로가 손에 잡힐 듯 했다. 계속 좁은 도로를 따라 가면 이내 몇 백 년이 족히 되는 수령의 마을 수호신 팽나무가 보이는데 그 바로 옆에 장절각이 자리 잡고 있다.


장절각 정면에는 고종황제로부터 명정(銘旌)을 받은 글씨가 큰 선비를 말하듯 붉은 현판에 큼직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고 장절각 안에는 비문으로 수은선생의 약력과 역사적 기록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상단에는 평소 수은 강항 선생이 취미생활로 즐겨 그렸던 송학(松鶴)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구례군지정 문화재 5호로 지정된 후 새롭게 단청(丹靑)을 더하면서 애석하게도 송학(松鶴)그림이 지워져 버렸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 지워진 송학그림이 희미하게 남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안타까움을 자아낼 뿐이다.


장절각에 정확한 자료는 나중에 받아 본 구례군지 기록을 보고서야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구례군지에는 충신(忠臣)강항(姜沆)정려(旌閭)라고 제목을 정하고 설명한 글이 있다. 소재지 : 구례읍 봉서리 샘골 1369번지로 나온다. 충신 강항 정려는 봉서리 샘골 앞 도로변에 위치한다.


구례향교를 지나 얼마 안 가서 도달되는 향나무노거수가 반기는 그쪽에 세워져있다. 이 유적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포로가 되어 왜국으로 압송되어 가다가 2년 8개월만에 다시 귀국하게 되었던 학자이자 충신인 수은 강항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유적지이다.


이 유적은 원래 1882년 명정 건립과 함께 이후 글 서두(序頭)에 말했던 강씨촌에 살았던 수은공 9대손 호영(鎬永)이 1886년 구례읍 봉서교 옆에 <수은강항선생 장절비>를 세웠던 것이 단초가 되었다.


추정하건데 진주 강씨가 구례지역으로 이거 정착하게 되었던 것을 지금으로부터 120 여 년 전이라고 전하고 있는 바로 보면 1870년경에 진주 강씨들이 이곳 구례로 이거 정착하면서 선조에 대한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이 유적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이렇듯 구국의 충신에 대한 강씨촌 지역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거듭된 상소로 드디어 1882년 조선의 말기에 고종황제로부터 명정(銘旌)을 받는다. 이어 1886년 뜻있는 구례의 유림들이 발벗고 나서 구례읍 봉서교 옆에 장절각을 짓고 장절비를 세웠다. 이후 정확한 연도는 없으나 이 지역의 국도확장 공사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이설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정려(旌閭)의 명정에 새긴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朝鮮) 충신(忠臣)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吏曹)판서(判書) 겸(兼) 지경(持經)정의금부(義禁府)사(事)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藝)문관(文官) 대제학(大提學) 지춘추(知春秋)관(館) 성균관(成均館)사(事) 시강원(侍講院) 좌빈객(左賓客) 행 통훈대부(通訓大夫) 형조좌랑(刑曹佐郎) 강항(姜沆) 지여>

<수은강항선생장절비>

<장절비(獎節碑)는 대제학 김상현(金尙鉉 *1811-1890)이 시장(諡狀) 찬(撰) , 신도비는 교리 이종문(李種文)이 짓고 전각은 권익상(權益相)이 했다. >


이번에는 이어진 비문의 글에 집중했다. 다만 아쉬운 건 당시 많은 자료를 참고하지 못한 관계로 단조로운 비문 글을 보면서 아쉬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강항(姜沆1567-1618)은 학자로서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이며 강희맹의 5대손이며 강극검의 아들로 영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 5세에 글을 지었고 7.8세에는 경, 사, 자, 집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고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었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 박사 전적을 거쳐 공조, 형조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병호판서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당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다시 순찰사 종사관인 김상준과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 전세가 불리해 지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베로 남행하다 도중에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 오오사카로 압송 당했다.


그는 포로생활 속에서도 학식이 높은 일인 순수좌, 경안 등 승려들에게 유학을 가르쳐 주면서 지리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적의 사정을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했다. 다시 그곳에서 적의 사정을 적어 밀송하고 1600년(선조33)포로생활에서 풀러 나와 가족들과 귀국하였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성리학을 전하여 일본 유학의 원조가 되었으며 많은 명유를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1602(선조35)년 대구교수에 제수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곧 사임하였으며 1608년(선조41) 다시 순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향리에 머물면서 자신의 학문 수양과 후학양성에 힘 써 많은 선비들이 그의 학문을 숭상하여 (많은 인재들이)몰려 들었다고 하며 또한 인물화 송화 등에도 특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658년(효종9/사후40년) 문집이 이루어짐에 이에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찬(撰)하여 썼으며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증직되다. 권, 잡저, 권 4는 행장, 묘지, 묘갈명 등이 주요내용이다. 특히 간양록은 일본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강항이 일본 복견성에 억류되어 있으며 틈틈이 왜의 사정 등을 적어 두었다가 본국에 밀송한 기록과 자신의 섭란사적 내용 등을 합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책 제목을 건거록이라 하였으나 제자들에 의해 간양록이라 개칭하였다.


현재 충신 강항정려는 정, 측면 각각 1칸의 목조와가 맞대어 출입문을 중심으로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져있다. 그리고 조선(朝鮮) 충신(忠臣)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吏曹)판서(判書) 겸(兼) 지경(持經)정 의금부(義禁府)사(事)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藝)문관(文官) 대제학(大提學) 지춘추(知春秋)관(館) 성균관(成均館)사(事) 시강원(侍講院) 좌빈객(左賓客) 행 통훈대부(通訓大夫) 형조좌랑(刑曹佐郎) 강항(姜沆) 지여


⓵이들에 의해 건립된 ⓶수은강항선생장절비대제학 김상현(金尙鉉) 시장(諡狀) 찬(撰), 교리 이종문(李種文) 짓다.⓷제보자 : 강대순(姜大淳) 구례읍 봉남리 118번지>

이처럼 위의 글을 보면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정제(整齊)된 언어로 표기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선양사업이 이래서 어렵다는 걸 또 다시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423년의 사건을 오늘 현재에서 사는 것처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물론 그 시대의 시대정신은 잃지 않아야 하겠지만 똑같이 느낌을 받아서 생각을 같이 해야하고 똑같은 표현을 통해 위인(偉人)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애국애족의 선비정신과 사방에서 에워 둘러 싼 당시에서 도망치듯 죄인의 심정으로서 통절한 마음의 심정을 그려야만 했다.


그러한 수은 강항은 선조임금을 벗어나 건거록을 읽은 영조가 크게 선생의 덕을 칭송했으며 정조와 인조 그리고 효종을 거쳐 고종 때까지 무려 조선의 5대왕이 칭송을 하고 절의를 크게 인정을 하였던 것을 우리는 똑바로 직시(直視)해야만 할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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