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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송여종비 편)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했고 자식이 되어는 효도 했으니 얼마나 어진가. 살기도 원치 않고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勇한가.
등록날짜 [ 2021년11월14일 14시31분 ]

필자는 2021년 5월 21일에 강재원 영광내산서원보존회장, 직계(直系)손이자 보존회원인 강대식 위원과 함께 그동안 벼르고 벼른 김제 금산면에 송여종 장군 묘를 찾아가기 위해 서광주 세무서 주차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수은집』 내용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김제 금산면사무소를 먼저 찾아갔다. 면직원이나 인근 주민들에게 수소문하면 금방 쉽게 찾을 것이라는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매사에 준비부족이 언제나 큰 문제라는 걸 보여주듯 보기 좋게 넉아웃 당했던걸 지금부터 말해 보겠다.


금산면사무소에서는 어느 직원하나도 송여종 장군에 대해서 전혀 아는바 없었고 송여종 묘소의 행방조차도 몰랐다. 다만 건네준 주소를 보더니 묘 근처로 추정되는 마을이장만 사무적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정작 소개받은 현지 이장도 송여종 장군이 누군지도 몰라 결국 엉뚱한 곳을 가르쳐 주게 되었고 일행은 타인의 묘소 또는 엉뚱한 절터만 구경하고 나오는 둥 이렇게 몇 번을 헛걸음질을 하고 나서야 깨닫게된 건 이제 더 이상 마을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갖는게 무의미하다는 결론이었다.


시간만 낭비하는 헛수고를 접고 그냥 되돌아 갈까하다가 최후수단으로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 보기로 했다. 위인(偉人)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잘 풀이되어진 지식백과나 나무위키 등에는 아예 글이 없고 오로지 카페나 블로그 글만 다수 보였다.


그러나 역시 송여종 장군 묘소 주소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었다. 또 다시 수차례 허탕을 치다가 어느 카페에서는 아래 글 부분에 네비게이션에 송여종의 묘소근처의 민가 주소가 나오는 글을 보고 그 주소대로 무작정 찍고 따라가기로 했다.


시골길은 농로길이 대부분으로 터덕거리고 덜컹대는 길이다. 어느덧 도착한 곳이 조그마한 산 인근에 떨렁 자리 잡은 민가 집 주소지였다. 강재원회장이 그 집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면서 송여종 장군 묘를 물어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송씨 문중으로 시집와 송여종 장군 묘소 뿐 아니라 그 후대까지 모셔놓은 문중의 묘소를 관리하는 역할까지 하는 여성이었다. 거의 3시간 이상을 허비해 겨우 송여종 장군 묘소를 문중 산 가장 꼭대기에서 찾은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송씨 문중 산의 분위기에서 수은 선생이 지은 ‘송여종(宋汝悰)의 비명(碑銘)’은 찾아볼 라야 찾아 볼 수가 없는 구조였다. 문중에서는 가장 윗대로 송여종(宋汝悰)을 모시고 있었지만 후대로 내려  올수록 부귀영화를 누린 조상이 있었는지 한 두 개의 잘 모셔진 묘를 바라보면서 상대적으로 송여종의 묘는 을씨년스럽게 보여 후손이 아니지만 왠지 더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 수은 선생이 비명을 지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420여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왔지만 너무나 어렵게 찾아간 곳이라서 누군가가 차후에라도 송여종의 묘를 찾아 나서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찾기를 희망하면서 묘소 민가 주소지 안내를 저절로 하게 되고 만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134-2(민가)

 

아래는 또 하나의 역사를 발굴하듯 찾아 나서게 된 송여종 장군에 대한 수은선생이 지은 수려한 묘비명과 내용을 소개한다.

 

◎ 송여종(宋汝悰)의 비명(碑銘)

公諱汝悰, 字彦蘊, 其先礪良人也, 礪良之宋, 自麗顯, 有諱叔文, 官至政堂文學, 八代而至諱演孫, 以中廟舊學, 累遷至通政大夫韓山郡守, 韓山生三子, 俱以文行樹立, 其季諱世珩最貴, 爲吏曹判書兼同知經筵, 判書生諱昌, 補靑巖道察訪, 以公征倭勳, 追贈嘉善大夫刑曹參判, 是實生公, 公生十二, 喪大夫人, 奉先公事繼母撫弟妹, 以孝友聞, 長而于思岳立九尺, 鄕黨皆曰判書有孫, 捐去俎豆事, 自力於弧矢, 累捷於鄕而累不利, 歲壬辰, 倭賊下海長驅, 擧國莫不奉頭爲自全計, 公毅然自奮, 挺身赴樂安郡守申浩幕, 浩素器公, 悉以郡事委公, 及浩以左水使李公舜臣部署, 討倭于閑山島, 公未嘗一日不在軍中, 及舟師大捷, 李公欲得獻馘者, 難其人, 時大駕蒙塵, 三京失守, 沿路之賊, 複屯相望, 奔問官守者, 輒以道梗中道還, 李公聞公素蓄積徇國心, 檄公授狀啓, 公輾轉賊營, 晝伏夜動, 九死而得達行在, 上卽引見, 躬問邊上事, 賜酒勞問甚備, 朝廷皆比之顔平原之李平也, 卽除西部主簿, 自上傳于吏曹曰, 全羅左水使軍官宋汝悰, 間關跋涉, 千里遠來, 至爲可嘉, 南方守令中可補有闕處, 吏曹卽擬除南平, 兵曹又啓曰, 鹿島前萬戶中丸死, 當極擇其代, 宋汝悰雖已除南平, 曾立功舜臣管下, 諳習水戰, 以此人代之, 傳曰允, 遂轉鹿島萬戶, 公到任上訖, 以船爲家, 日討軍實, 甲午四月, 朝廷別設武擧於舟師, 以慰水軍將士, 公中乙科第七名, 時年四十二矣, 歲丁酉, 李公舜臣以言去, 元均代爲統制, 賊以其年七月陷閑山島, 舟師盡覆, 而公船獨完,


人皆曰神明所扶持, 及李公起廢, 復統舟師, 收合餘燼, 繕完未畢, 而賊船二百艘已到碧波前洋, 我船僅十艘, 而無不賈勇先登, 一當百者, 捷奏, 公爲上功, 及李公進駐寶花島, 聞興陽之賊四出殺掠, 以公爲伏兵將, 給精兵百餘, 公銜枚出入, 引還被擄男女, 勦殺賊兵無算, 賊不得樵采, 遂移順天, 戊戌七月, 李公又令公領蒙衝六艘, 把守水路, 公卽引發, 隱泊鹿島前洋, 賊船十艘乘海霧潛至, 將爲夜驚計, 公卽詗知, 擧帆直進, 厮殺無遺, 凱還, 李公卽褒啓, 唐將亦賞銀布甚厚, 十一月, 李公大會舟師, 鏖戰于露梁, 賊兵大敗, 海水爲赤, 中興戰功, 此爲第一, 而公功又爲諸將先, 己亥, 除丹城縣監, 庚子, 特加折衝, 以酬前勞, 入京謝恩, 拜司僕將, 辛丑, 出爲臨淄僉使, 瓜滿, 拜興陽縣監, 乙巳, 賜宣武原從功臣錄券, 追贈先公, 頃之拜昆陽郡守, 以事罷, 丁未, 除慶尙右道水軍虞侯, 在任, 奔先公喪, 哀疚成疾, 己酉八月, 卒于喪次, 享年五十七, 將葬, 以長子震慶原從功, 追贈嘉善大夫漢城府右尹, 以其年十一月庚辰, 葬于象頭山辛坐乙向之原, 公稟性夷粹, 操心謹厚, 待人物, 都削邊幅, 恤親戚, 多待而擧火者, 謙卑巽順, 始終如一, 而及至臨陣對敵, 挺然不撓, 八年海國, 大小六十餘戰, 矢石落左右, 略不動色, 奮褊裨提孤舟, 所立猶如是, 使其將三軍當一面, 則其成就豈有量哉, 公配貞夫人金氏, 學生友頤之女, 生四男一女, 男長曰震慶, 中乙亥武科, 拜黔毛浦萬戶, 娶主簿柳謹之女, 生一女, 次曰震綱, 娶守門將柳慶胤之女, 生一男, 次曰震善, 中壬寅武科, 拜呂島萬戶, 娶學生曺慶膺之女, 生一男一女, 次曰震祿, 娶學生田翰鳳之女, 女適鄭德鳳, 先公亡, 有二男云, 銘曰, 仁者必有勇, 而勇者不必有仁也, 爲臣則忠, 爲子則孝, 如其仁, 生亦不願, 死亦不動, 如其勇, 智將固可尙, 而福將勝於智將也, 知申浩之可以托身, 知李公之可與有爲, 而樂就之, 不可謂不智也, 奮白手取金印, 其生也榮, 其死也樂, 不可謂無福也, 象頭之麓, 體魄所藏, 萬古風聲, 一片石章。

 

◎ 증우윤 송공의 비명(碑銘) 

 公은 이름(諱)은 汝倧이요, 字는 彦蘊이니 그 선대는 礪良人<여산은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이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礪良의 宋씨는 고려조 때부터 드러났으니, 휘 숙문(諱 叔文)은 벼슬이 政堂文學에 이르렀고 8대 만에 諱 演孫에 이르니 중묘(中廟 ; 중종)의 舊學으로 여러 번 벼슬이 바뀌어 통정대부 한산군수에 이르렀다. 韓山공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文行으로 명성이 났다.


그 막내의 이름은 세행형世珩)이니 가장 귀하게 되는 이조판서 겸 동지경연이 되었다. 判書공이 諱 昌을 낳으니 靑巖道察訪을 보임했는데 公의 왜구를 정벌한 공훈으로 嘉善大夫 刑曹參判을 追贈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公을 낳은 분이다.


 선생은 낳은 지 12년 만에 어머니(大夫人)를 잃고 아버지(先公)를 받들고 繼母를 섬기며 동생들을 어루만졌는데 효도와 우애로써 소문이 났다. 장성하자 수염이 아름다웠고 키가 매우 커서 9척이나 되었다.


고을(鄕黨皆曰)에서 모두가 [判書가 손자를 두었다] 하였는데, 俎豆의 일(禮文)을 집어치우고 스스로 무술(弓矢)을 익히기에 힘써 鄕試에서는 여러 번 합격을 했으나 과거에서는 여러 번 불리했다.


 임진년(1592) 왜적이 바다를 건너와 길게 몰아오니 온 나라가 모두 머리를 싸매고 자신들만 온전하려고 허둥댔다. 그러자 公은 용감하게 떨치고 일어나 낙안군수 申浩의 막장으로 찾아가니 浩가 본시 공을 중하게 여겼던 터라 郡事를 모조리 공에게 맡겼다.


 이윽고 浩가 左水使 李公舜臣의 部署가 되어 閑山島에 가서 왜를 쳐부수니 公도 하루도 軍中에 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수군(?師)이 大捷을 거두게 되자 李公이 捷報를 보낼 사람을 찾았으나 마땅한 사람을 얻기가 어렵게 되었다.


왜냐면 당시 임금의 수레가 蒙塵을 하여 3京이 지켜지지 못하고 연도에는 적들이 곳곳에 첩첩으로 둔치고 있어 관수(官守 : 行在)로 달려가던 사람들이 곧잘 중도에서 길이 막혀 되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李公이 선생의 본디 殉國心이 있음을 알고 공에 명령을 내려 狀啓를 맡기니 공은 적의 병영을 피하고 돌아 낮이며 숨었다가 밤이며 움직여 겨우 목숨을 부지해 行在에 이르니 임금께서 즉시 불러다가 보시고 몸소 변경의 일을 물으시고 술을 주며 위로하기를 극진히 하셨다.


조정이 모두 안평원(顔平原 : 顔眞鄕, 祿山亂에 平原을 지켰음)의 장계를 갖고 간 李平에 비유하였다. 즉시 西部主簿를 제수하고 임금께서 이부(吏部 : 吏曹)에 분부하시기를
 [전라도 좌수사 군관 宋汝悰이 멀리 천 리를 걸어왔으니 지극히 가상한 일이다. 남방의 守令 가운데 補闕할 곳이 있으면 보임하도록 하라]하셨다.


 吏曹가 즉시 南平을 제수하려고 했는데 兵曹가 또 啓하기를 [鹿島의  前萬戶가 탄환을 맞고 죽었으니 마땅히 대신할 사람을 잘 가려서 보내야겠으니 宋汝悰을 비록 이미 南平으로 제수했으나 일찍이 舜臣의 管下에서 공을 세워 水戰을 익숙히 알고 있으니 이 사람으로 대신케 하옵소서]하였다. 傳命하기를 [允許하노라]하였다.


 드디어 鹿島萬戶로 轉任이 되었는데 도임을 하고 나서는 선박(船)으로 집을 삼아 날마다 군대의 실황을 검토했다. 4월에는 조정에서 별도로 수군(?師)이 모두 엎어져 버리고 공의 배만 홀로 완전했다. 사람들이 모두 神明이 지켜준 것이라고 했다.


 이윽고 李公이 廢黜에서 다시 기용되어 다시 수군을 거느리게 되어 불타고 남은 것을 수습하고 수선하기를 끝마치기도 전에 적선 이백 척이 이미 碧波津의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때 우리 군대의 배는 겨우 10척이었는데 모두가 용맹을 뽐내고 앞장을 다투어 하나가 백을 당했다. 승첩을 아뢰는 狀에 공이 上功이 되었다.


 다시 李公이 寶花島로 나아가 주둔했는데 흥양(興陽 : 高興舊號)에 있는 적이 사방으로 나와 죽이고 약탈하고 한다는 소리를 듣고 공으로써 伏兵將을 삼아 精兵 백여 명을 주니 공은 군에게 재갈을 물리고 출입하며 사로잡혀간 남녀를 데려오고 적병을 수없이 쳐 죽였다. 적은 나무를 하지 못하고 드디어 順天으로 옮겨갔다.


 무술년(1598) 7월에는 이공이 또 선생을 시켜 큰 배 여섯 척을 이끌고 水路를 지키게 하니 공이 즉시 끌고 나가 鹿島의 앞바다에 숨어 배를 머물렀는데 賊船 10척이 바다 안개를 이용하여 살며시 이르러 야간에 습격할 계획을 하는 것을 공이 곧 탐지하고 돛을 세우고 바로 전진하여 모두 처치해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개선해오니 이공이 즉시 포상해주도록 啓聞하였고 唐將도 또한 銀布로 아주 후하게 상을 주었다.


 11월에는 이공이 수군을 크게 모아 露梁에서 무찔러 싸웠는데 적병이 대패하여 바닷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中興의 戰功에서 이것이 제일이었는데 선생의 공적이 또 모든 장수의 으뜸이 되었다.


 기해년(1599)에 丹城縣監으로 제수되고 경자년(1600)에는 折衝을 特加하여 전날의 수고에 보답했는데 京師에 들어가 사은을 하자 司僕將을 임명하였다. 신축년(1601)에는 臨淄僉使로 나가게 되고 만기가 되자 洪陽縣監을 拜하였다. 을사년(1605)에 宣武原從功臣의 錄券을 하사하고 부친(先公)도 追贈을 했다.


이윽고 昆陽郡守를 拜하였는데 일이 있어서 파직이 되고 정미년(1607)에는 慶尙右道水軍虞候로 제수되었는데 재임 중에 부친(先公)의 喪을 당하여 돌아와 너무 상심한 끝에 병을 이루어 기유년(1609)에 喪次에서 죽으니 나이 쉰일곱이었다.


 葬하려 할 적에 長子 震慶의 原從功으로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으로 追贈 되었다. 그해의 11월 庚辰日에 象頭山 辛坐乙向의 들녘(原)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順平하고 순수했으며 마음 갖기를 조심성 있고 두텁게 하여 사람을 대우하고 사물을 접촉함에 겉꾸밈이 전혀 없었고 친척들을 도와줘 덕분에 끼니를 잊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


겸손하고 온순하여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으나 陳을 임하여 적을 대할 적에는 우뚝한 자세로 끄떡도 하지 않아 8년 동안 바다에서 크고 작은 60여 싸움을 하면서 화살과 돌이 주변에 떨어져도 조금도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편비(偏裨 : 副將)의 장수로서 몇 척의 배를 이끌고도 공을 세운 바가 이러했거든 가령 삼군을 거느리고 한 방면을 맡게 되었다면 그 성취를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공의 부인은 정부인 김씨니 학생 友顯의 딸이다.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큰아들을 震慶이니 을해(1575)의 무과에 합격하여 검모포 만호를 拜했다. 主簿 柳謹의 딸을 娶하여 딸 하나를 낳았고, 다음은 震綱이니 守門將 柳慶胤의 딸을 취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다음은 震善이니 임인(1602) 무과에 합격하여 여도만호를 拜하였다. 학생 曹慶鷹의 딸을 취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다음은 震祿이니 학생 田翰鳳의 딸을 취하였고 딸은 鄭德鳳에게 시집가 공보다 먼저 죽었는데 2남이 있다고 한다.
 

 銘하노니 어진 사람은 반드시 勇이 있지만 勇한 사람은 반드시 仁이 있지만 못하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했고 자식이 되어는 효도 했으니 얼마나 어진가. 살기도 원치 않고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勇한가. 智將도 귀하지만 福將이 智將보다 나은 것이다.


申浩에게 몸을 맡길만 함을 알았고 李公이 함께 일을 할만한 줄을 알아 기꺼이 나아갔으니 智將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맨손(百手)을 떨치고 나서서 장군(金印)에 이르렀으니 그 삶이 영화롭고 그 죽음을 편안히 하였으니 복이 없다고 못 하리라. 象頭의 기슭이여 몸(體)이 감춰진 곳이로다. 萬古의 風聲이여 한 줄의 비문(石章)에 갖추어지도다.



수은 선생의 결어(結語)

‘맨손(百手)을 떨치고 나서서 장군(金印)에 이르렀으니 그 삶이 영화롭고 그 죽음을 편안히 하였으니 복이 없다고 못 하리라.’

위의 비명의 본문 글을 읽어보면 문장의 맥이 한 결 같은 표현으로 스스로 무술을 읽히고 군졸(軍卒) 병사 송여종으로 출발해 장군에 봉해졌다는 것이다. 또 전쟁터에서는‘적을 대할 적에는 우뚝한 자세로 끄떡도 하지 않아 8년 동안 바다에서 크고 작은 60여 싸움을 하면서 화살과 돌이 주변에 떨어져도 조금도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할 정도로 병사들의 귀감이 되고 따르는 군졸들에게 용기를 심어줘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상을 갖춘 인물이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기상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존경스럽다. 그래서 송여종의 묘소를 다녀온 사람으로서 후손들에게 감히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장군의 묘비(墓碑)석을 세워 위대한 조상인 여량(여산) 송여종(宋汝悰)의 선조는 고려조 휘 숙문(諱 叔文)으로부터 이어져 도도히 내려옴을 비명(碑銘)그대로 역사적 사실을 가치가 있게 묘비에 새겨 세세손손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함이 어떠 하실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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