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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해방정국 3년 (9)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임시정부 환국 환영회
등록날짜 [ 2022년01월24일 09시22분 ]
 김구 주석은 도착 이튿날인 11월 24일 오후에 서울방송국을 통해 귀국 소감을 밝혔다. 그는 ”혼이 왔는지 육체가 왔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 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출처 나무위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무르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경성에 도착되었습니다. 나와 나의 각원(閣員) 일동은 일개 평민의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 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로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료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6일) 
 
하지는 김구를 의 ‘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처럼 대접을 제법 극진히 했다. 김구를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11월 24일의 기자회견장에서 하지는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추겨 세웠다. 
 
미군정은 덕수궁에 임시정부의 본부를 마련해 주고, 미군 헌병이 경비를 서게 하였으며, 교통수단을 제공하였다. 다른 단체에 대하여는 무기 반납을 명령하였지만, 김구의 개인 수행원들이 무기를 지니는 것을 허용했다.

또 미군정은 인공에게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 못하게 한 것과는 달리, 임정에게는 ‘정부’ 또는 ‘내각’이라는 단어 사용을 허용했다.
 
12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임정 환국을 축하하는 환영회가 3만여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오세창은 “갈망하던 임시정부 간부가 환국하였으니 이 지도자(김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자.”는 개회사를 하였다. 
 
김구는 자신에 대한 성대한 환영에 흡족해 하면서 그 감격을 이렇게 기록했다. 
 
“국내에서 환영 선풍이 일어나자 군정청 소속 기관과 정당 · 사회단체며 교육·교회·공장 등 각종 부문이 쉴 틈 없이 연합환영회를 조직하였다. 나 자신과 우리 일행은 개인 형식으로 입국하였지만, 국내 동포들이 정식으로 ‘임시정부환영회’라고 크게 쓴 글씨를 태극기와 아울러 창공에 휘날리고 일대 성황리에 시위 행렬를 진행하니, 만 리 해외에서 풍상을 겪은 온갖 고통을 동정하는 듯 싶었다.

행렬을 마친 후 덕수궁에서 연회가 열렸는데 그 성황은 참으로 찬란하였다. 서울기생은 총출동하여 400명 이상이요, 식탁이 400여 개며, 이루다 기록하기 어려울 만큼의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 중장을 비롯하여 미군정 간부들과 참석한 동포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덕수궁 광장이 비좁을 지경이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p 125-126) 
 
임정 요인 1진이 귀국한 지 열흘 후인 12월 2일에 상해에 남아 있던 김원봉·홍진·김성숙·신익희·조소앙·조완구 등 임시정부 요인 2진 22명이 귀국하였다. 2진은 1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2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이 탄 비행기는 폭설이 내려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지도 못하고 저녁 무렵 군산 비행장에 내렸다. 이곳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다가 논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대전 유성에서 비행기를 타고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1진과는 달리 2진에 대한 미군정의 대우는 형편없었다. 
 
12월 6일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경교장에 모였다. 제1진과 제2진으로 귀국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원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참석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이날의 모임을 “환국 후 전 각료가 모여 첫 국무회의를 열었다.”고 크게 보도하였다.

국무회의는 국내정세에 대한 보고를 듣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의 갈등으로 한가지 안건도 상정하지 못하고 산회되고 말았다. (강준만 저, 위 책, p 13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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