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1. 16(수) 맑음
쿠주고원- 벳부항- 야와타하마항- 강항 현창비- 오즈시민회관 환영회- 오즈성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밤에 이동하느라 주변을 감상하지 못했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다. 물론 10여 년 전에 왔었다고는 하지만, 지우개가 작용했는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게 별로 없었다.
쿠주 고원은 아소산 북쪽에 자리한다. 아소산의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고원이다.
너비 18km, 길이 25km의 아소 쿠주 국립공원은 화산 봉우리, 초지, 경작지가 함께 어우러진 관광지이다. 이른 아침이라 붉은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풍광은 매우 멋졌다. 아소 오악이며, 활화산임을 증명하는 수증기, 마소가 한가로이 풀 뜯는 모습이 연상되는 드넓은 풀밭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묵은 쿠주 고원 코티지는 일본 자연보호협회에서 인정한 온천 호텔이라고 한다. 쿠주 고원의 광활한 자연과 함께 노천온천을 즐길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란 생각이다. 코티지는 별장은 별장인데 작은 주택을 말한다.
바로 우리가 묵은 방을 그리 부르는가 보다. 자연을 관광 자원화해 주민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일본인의 상술 결과가 쿠주 고원 코티지라고 본다.
일행을 실은 버스는 시코쿠행 배를 타기 위해 벳부항으로 향했다. 고원을 내려가며 주변을 감상했다. 제주 산굼부리에서 본 억새가 여기서도 바람에 살랑거린다. 아름드리나무들이 키재기를 하고 있다. 내 일본 여행에서 부럽다고 생각되는 게 바로 조림이다. 일본인들은 산에 계획 조림으로 애써 삼나무를 심어 가꾼단다.
재목으로 가치가 훌륭한 나무를 이름해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산은 일본같이 산지 활용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 소나무, 참나무 등 잡목이 멋대로 자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즉 건축이나 가구 제작용 목재 생산을 위한 계획 조림이 아니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 쿠주 고원에도 계획 조림 흔적이 보여 부러웠다.
벳부항 못미처 언덕 위에 자리한 휴게소에 정차했다. 일행은 모두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벳부항이 내려다보이고, 태양이 비친 바다는 은빛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산은 나무가 아닌 풀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아마도 화산 영향인 것 같다. 그나저나 여기 주변 풍경도 퍽 평화로워 보였다.
평화로운 지구촌을 전쟁의 공포에 몰아넣은 러시아의 만행을 떠올려보았다. 푸틴이란 지도자 한 사람의 정신 착란적인 만행이 지금 세계를 불안하게 하며 큰 재앙과 불행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는 벳부항에서 야와타하마항으로 가기 위해 훼리호에 몸을 실었다. 3 시간 가까이 배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니,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생각이 바뀌었다. 강항 선생께서 목선 타고 끌려가던 생각을 하게 되어서다. 강항 선생은 시모노세키에 잠시 머물다 곧바로 오즈시까지 무동력선으로 이동했다. 그때 그 고생은 감히 筆舌로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강항 선생보다 훨씬 짧은 거리를 쾌속선을 타고 안전하게 이동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수은 선생의 심정으로 여행하라’라는 당부를 했는데…….
승선 후 선내를 살피고 갑판에 올랐다. 날씨가 좋아서 바람도 불지 않고 차갑지도 않았다. 얼마 동안 주변을 감상하며 갑판에서 시간을 보냈다. 일행 중 원로 몇 분과 사진도 찍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한 방에서 같이 지내는 강남주 선생과 간간이 이야기했다. 강 선생은 커다란 카메라를 소지했다. 또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아마도 사진 촬영이 취미인 것 같았다. 33년간의 오랜 공직생활을 끝내고 역사 연구와 집필, 등산 그리고 사진에까지 취미를 붙였으니, 정말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벳부항을 출발한 지 20여 분쯤 되었을 때 누가 신일본제철이 보인다고 했다. 우측으로 멀리 신일본제철이 보였다. 일본 최대의 제조업체로 우리 귀에 낯익은 회사이기 관심이 갔다.
1968년 산업 입국을 기치로 내걸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의 영일만에 산업의 쌀인 철강공장을 세웠다.
철의 사나이 박태준 사장을 앞세워 출발한 포항제철은 ‘포스코’란 이름으로 새롭게 변신했으며, 지금은 세계 제1위의 제철소가 되었다. 사람들은 포스코의 성공 뒤에 신일본제철의 기술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일본에 사람을 보내 기술을 익히게 하고, 또 일본 기술자를 불러들여 기술 지도를 받았다.
그들 일본 기술자들은 입맛도 퍽 까다로웠다고 한다. 그들은 죽순을 먹기 위해 봄철에는 거제도를 찾았고, 가을 송이 철에는 봉화와 태백 등으로 몰려갔단다.
그러나 세월은 변해 죽순도, 송이도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 즐겨 먹는 먹거리가 되었다. 이런 행복을 누리게 되기까지는 이 땅을 온전하게 지킨 애국충절인과 성실한 국민 덕분이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게 도리라고 본다.
객실 휴게소에서 쉬고 있는데 강재원 내산서원 보존회장께서 부르셨다. 영광 문화관광 해설사들과 대화를 나누라는 거였다. 객실 바닥에 앉아 20명 해설사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했다. 그들은 관광객들에게 내산서원을 안내하다 보면 주벽인 강한 선생 외에 윤순거 선생도 같이 설명해야 하는데, 뭔가 좀 부족한 게 있는 것 같아서라고 했다.
설명은 거의 윤순일생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지사로서의 의로운 삶에 대해 힘주어 설명했다. 그리고 강항 선생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뜻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힘쓴 내용도 덧붙였다.
이윽고 갑판에 올라 오늘의 여행 의미를 정리해 보았다. 친 할아버지께서 살아생전 직접 걸으신 길은 아니지만, 존경하는 스승이 걸으신 고난의 길을 손자가 걷는다는 자긍심으로 임하자고. 거기에 더불어 이런 소중한 기회를 준 강재원, 강대의 회장의 노고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꿈에도 그리던 오즈 시민회관에 도착했다. 일본 측 회원들 환영의 박수를 받은 우리는 먼저 현창비에 헌화 묵념을 했다. 강대의 단장께서 동토 후손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같이 헌화할 기회를 주었다. 정말 감동의 순간이었다. 동토 할아버지의 존경하는 스승이신 강항 현창비에 헌화하는 영광을 얻었으니 이 순간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홍유 강항 현창비’!
무사들이 패를 지어 군웅할거 하던 미개국이, 풍신수길에 의해 겨우 하나가 된 마당에, 강항 선생이 비로소 문명의 씨를 뿌리신 것이다. 하여 일본 사람들은 강항 선생을 ‘일본 유교(신유학, 성리학)의 비조’로 받들고 있으며, 그 징표가 바로 현창비가 아닌가 한다.
수은 강항 선생 일본 연구회 무라까미 쓰네오 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워진 현창비는 한일 양국 어린이들의 역사 교육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오즈시 초등학교 사회과 보조 교과서에 강항 선생이 소개되어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필자가 현직에 있을 때 초등학교 3학년 사회과 교과서는 국정이 아닌 지역 교과서를 개발해 지도했었다. 그때 논산시 지역 교과서 집필 위원으로 참여했는바, 지역을 빛낸 역사 인물을 찾아내 ‘향토충절인’이란 장에 소개했던 기억이 났다. 영광군에서도 당연히 지역 교과서에 강항 선생이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으리라 믿는다.
지역의 인재는 지역의 자산이다. 그들이 자라 제 몫을 톡톡히 할 때 지역은 빛나는 것이다. ‘향토 사랑 나라 사랑’이란 말이 있듯, 향토를 사랑하는 인재를 키워내는 것 또한 지자체의 몫이라고 본다. 따라서 영광군에서는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고교에서도 강항 선생의 애국 충절 교육을 시행함이 옳지 않을까 한다.
비 하단에 강항 선생 연보가 있다. 거기 끝에 제자 윤순거가 ‘간양록’과 ‘수은집’을 간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세히 보아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국땅 외진 곳에 동토 서생 행적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분명 자랑이다. 귀국하면 일가들에게 이 감동을 분명히 전하겠다. 모두가 자긍심 갖고 위선사에 매진하자고 강조할 것이다.
오래도록 현창비 주변을 살피다 발길을 돌리며, 윤순거 선생이 스승 강항 선생을 애도하는 글을 생각해 보았다. ‘진정한 스승에 진정한 제자의 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姜睡隱輓(강수은만) 수은 강항을 애도하다
恭惟睡隱老先生(공유수은노선생) 공손히 수은 노 선생을 생각하니
八代之文四海聲(팔대지문사해성) 팔대 문헌가로 천하에 명성 떨쳤네
黼黻明章今屈子(보불명장금굴자) 아름다운 밝은 문장은 오늘날의 굴원이고
雪霜標節古蘇卿(설상표절고소경) 추상같은 밝은 절개는 옛날 소식이라
精忠異城猶知慕(정충이성유지모) 정충은 이역 땅에서 오히려 사모함 알았고
篤敬蠻邦信可行(독경만방신가행) 독실하고 공경함을 오랑캐 땅에서 행하였네
不奈道高而命薄(불나도고이존박) 도가 높고 명이 짧으니 어찌 하겠는가
任敎新困也心亨(임교신곤야심형) 성실한 가르침에 몸은 곤궁하나 마음통했네
오즈 시민회관 강당에서 ‘수은 강항 선생 족적 탐방단’ 환영회가 열렸다. 우리 측 탐방단 38명과 ‘수은 강항 기념사업회’ 일본 측 회원 다수가 참석했다. 일 측 인사의 환영사가 있었고, 우리 측 답사가 있었다. 필자는 강대의 단장의 소개로 단상에 올라 윤순거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통역이 있기 천천히 핵심을 설명했다. 즉 절의(節義) 정신이 강한 선비로 스승을 위해 많은 정성을 쏟았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강항과 윤순거의 절의 정신을 되살려 21세기 한일 양국의 글로벌 정신으로 승화시켜 나가자고 했다.
기념공연으로 드라마 주제곡 ‘간양록’과 ‘강항의 노래’를 불리어 졌다. 전에 대중가요 가수로 활동했던 이기선 가수가 노래 실력을 한껏 뽐내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 최용 우도농악회장의 장구춤이 이어졌다. 남도농악 전수자인 최용은 날렵한 몸매로 갖가지 동작을 선보였다. 한 마리 학이 날갯짓하는 등 아름다움을 선사해 역시 힘찬 박수를 받았다.
오즈성은 강항 선생께서 머무신 곳이다. 여기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출석사 출입을 하셨던 것 같다. 우리는 천수각에 올라 주변을 감상했다. 역시 성곽 뒤편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 성곽 입지 조건이 적합했던 것 같다. 천수각은 전통 성곽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말하는데, 오즈성 천수각 역시 멋스러웠다.
일행은 오즈성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다 현창비 뒷면에 멈췄다. 거기 강항 선생의 시가 있어서다. 강대의 단장이 설명을 해달란다. 몸이 마음이 시키듯 사양을 했다. 부끄러웠지만, 글이 짧아 별도리가 없었다. 한편으론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 많은 세월 제대로 된 한문 공부를 하지 못한 것 말이다.
강항의 시는 출석사 주지 호인의 부탁을 받고 부채에 써 준 것이라 한다. 강항의 임금과 고국 그리고 백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왔다.
儒學者 姜沆 七言律詩(유학자 강항 칠언율시)
錦張明朗落海東(금장명랑락해동) 해동이 여기든가 천리밖 아득한 곳
絶程千里信便風(절정천리신편풍) 바람 편에 보내는 소식 아는가 모르는가
鳳城消息鯨濤外(봉성소식경도외) 봉성 옛터의 소식은 아득하고
鶴髮儀形蝶夢中(학발의형접몽중) 꿈도 물결에 쌓여 오도 가도 못 하네
兩眼却慙同日月(양안각참동일월) 두 눈을 씻고 보라 일월이 아득거냐
一心猶記舊鴛鴻(일심유기구원홍) 한마음 기러기 뜻을 사귄 지 오래다
江南芳草群鶯亂(강남방초군앵란) 강남에 꾀꼬리 울고 꽃 피어 만발한 곳
倘有飛艎返寓公(당유비황반우공) 만일 하늘을 나는 배 있다면 나를 보내다오
오즈성을 둘러보고 현창비를 떠나오며, 강항 선생께서 일본으로 끌려와 여기 오즈에서 생활하신 과정도 한 편의 드라마란 생각을 해보았다. 강항 선생은 조선 땅보다 더 넓은 왜국 네 개 섬 중, 가장 작고 외진 시코쿠에 어떤 연유로 정착을 하게 되셨을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했다.
강항 선생은 1597년 9월 23일 영광 앞바다 논잠포에서 왜 수병에게 피로되었는데, 그 자가 신칠량 노부시치다. 노부시치는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 시 일본 수군 총대장이던 도도다카도라(좌도)의 부하다. 이순신에게 패해 자기네 집결지로 이동 중이던 노부시치에게 운수 사납게 피로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후, 국내 불만 세력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정명가도(征明假道)란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일으킨 게 왜란의 그 첫째 배경이다.
조선 침략군의 주력은 히데요시 군사였지만, 규슈와 시코쿠 그리고 주고쿠의 다이묘 군사를 재편성해 그들을 선봉에 내세웠다. 그때 수군으로 참여했던 게 시코쿠의 도도다카도라였던 것이다. 따라서 강항은 포로 신분으로 도도다카도라 영지인 오즈성에 피로인(被擄人)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하루 일정을 무리 없이 끝내고 차에 올라 숙소로 향했다. 숙소를 배정받고 강남주 선생과 함께 짐을 풀었다. 신축호텔이라 깨끗했지만, 우리나라 호텔 객실에 비해 너무 작았다. 여기서 이어령 교수의 1980년대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생각났다.
이어령 교수는 일본의 축소지향 문화가 근대화를 일으킨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그들은 서구의 확대 지향 문화를 쫓다가 결국 세계 2차대전을 일으켰고, 패망이란 쓴맛을 보게 되었던 것이라 설명했다.
이러한 축소지향적인 사고는 호텔만이 아니다. 그들 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대강 눈에 띈 것만 해도 작게작게 만들고 쓰며 살아가자는 게 그들의 습관인 것 같다. 밥상에 오른 김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우리나라 밥상의 김 1/4 수준이라고나 할까? 반찬 담는 그릇도 모두 작다. 우리 같으면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아내야 푸짐하다고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올망졸망하고 뭔가 비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쉽게 거리의 자동차를 잠깐 비교해 보자. 우리와는 정반대다. 일본의 거리는 소형(小型)차 물결이다. 우리는 자꾸 큰 차 중형차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언제고 소형차가 거리를 꽉 메우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인의 근검절약 정신은 배워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은 직장을 잡으면 우선 새 차부터 뽑는다고 한다. 그것도 소형차가 아닌 중형차 이상을. 돈이 모자라면 할부로 사들이거나 대출받기도 하고. 각자 가치관 차이겠지만, 지나친 낭비는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강남주 선생과 대화를 통해 바람직한 노년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강 선생은 연구하는 공직자의 길을 걸어온 게 아닌가 한다. 현직에서 바쁜 일과 중에도 꾸준히 논문을 써 법원 행정의 개선에 이바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늘 건강한 삶을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해왔으며, 특히 등산을 즐겼단다. 그래서인지 80이 가까운데도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강 선생은 퇴직 후 바로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며 ‘사마천의 사기 속의 진시황’이란 역사서를 저술 출간하기도 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선생의 역사서는 바탕이 튼튼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 어려운 일을 쉼 없이 준비해 왔으니, 정말 박수를 받을 일이다. 이러한 활동을 하시는 강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국(異國)에서의 깊어가는 가을밤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이후 계속해 연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