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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조선의 청백리 - 4회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탁 근절의 표상, 청백리 이후백
등록날짜 [ 2023년01월17일 21시04분 ]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가장 공정하게 인사를 한 이조판서는 누구일까? 선조 때 이조판서를 한 청련 이후백(1520∼1578)이다.
 
1578년 6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이후백의 일화가 적혀 있다.
 
“이후백이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대화 중에 벼슬을 부탁했다.

이후백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줬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돼 있었다. 이후백은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요.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라고 말했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봤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 했다.”
 
한편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에서 영전해 이조판서가 된 것은 1577년 10월이다. 그는 1575년부터 함경도 관찰사를 했는데 ‘청렴 근신하고 밝게 살피어 시정(施政)에 조리가 있었고,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의 선정을 사모해 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선조수정실록 1577년 10월 1일).
 
함경도 관찰사 시절에 이후백의 별명은 ‘곤장 감사’였다. 그는 각 진을 순시하면서 변방 장수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치렀는데 실력이 없는 자는 곤장을 때렸다.
 
당시에 이순신(1545∼1598)은 1576년 12월부터 함경도 최북단 삼수 고을 동구비보 권관(종9품 경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이순신은 1572년에 낙마로 무과에 낙방한 후, 1576년에 급제했다).
 
이순신은 여진족의 침범에 소임을 충실히 했고 활도 잘 쏘아 이후백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제장명은 『이순신 파워인맥』 책에서 ‘강직·청렴한 이후백이 이순신의 공직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1580년 7월에 이순신은 전라도 고흥군 발포만호로 영전했다. 수군 근무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전라 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 하니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라고 연락했다.

이순신은 ‘이 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 키워온 나무를 하루아침에 벨 수는 없습니다’ 라며 거절했다. 이는 이후백의 청렴과 강직을 본받은 행동이었다. 성박은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1582년 1월에 이순신은 군기 경차관 서익으로부터 군기 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징계를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서익의 보복적 갑질이었다. 
 
또한 이후백은 한시(漢詩)의 대가였다. 이름도 당나라 시선 이백(李白 701∽762) 이후에 태어났다 하여 후백(後白)이라 했고, 호(號)도 이백의 호 청련(靑蓮)을 그대로 썼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청련 이후백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의 문장 겨루기 일화가 실려 있다. 광주목사 오겸이 두 사람을 초청해 이틀간 문장 시합을 시켰다. 첫날은 이후백이 시 짓기에서 이기고, 둘째 날은 기대승이 문장 짓기에 이겨 서로 비겼다 한다.
 
한마디로 이후백은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단속해 청고(淸苦)함을 지켰다. 
『선조수정실록』 1578년 10월 1일의 이후백 졸기에 나온다. 
 
“ 호조판서 이후백이 졸하였다. (...) 그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기개가 있었다. 그가 비록 문한(文翰)에 종사하였지만 몸단속을 엄숙하게 하였고 말할 때나 조용히 있을 때에도 절도가 있었으며 기쁜 표정과 언짢은 표정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자제들이나 아랫사람들이 감히 시사의 득실에 대하여 묻지를 못했다.
 
그는 벼슬이 육경(六卿)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가난하고 소박하기가 유생과 같았다. 비록 선배 명류로서 서인으로 지목을 받았지만 그는 좋다 나쁘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후진들도 역시 그의 전주(銓注)에 승복하였다.

김효원이 번번이 선진(先進)들을 공박하면서 항상 하는 말이 ‘이후백은 단지 육경의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된다면 나는 그를 논박할 것이다.’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가 정승이 되기를 기대했었는데 갑자기 졸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노진과 이후백이 잇따라 죽자 정2품에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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