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시인 정지용
2010년 5월 지용제가 열리는 옥천을 찾았다. 정지용 시인의 따님인 정구원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사실 정구원씨를 만나려는 것은 정지용 시인의 가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서였다. 매년 가을이면 논산에서 보은을 찾아 선조 산소 벌초를 했다. 아침 일찍 트렁크에 낫을 싣고 논산 연산과 벌곡, 금산 진산과 마전을 거쳐 옥천 읍내를 통과 보은으로 들어가는 코스를 즐겨 이용했다.
문학에 관심이 많아 벌초 후 돌아오는 길에 옥천 구읍에 있는 정지용 고택과 문학관을 자주 찾았다. 한번은 시인의 연보를 보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시인의 여동생 화용씨가 논산의 박씨 가로 출가했다는 사실이다. 가슴이 설렜다.
‘그렇다면 정지용 시인도 누이를 만나기 위해 우리 고장 논산을 방문했겠구나.’
정지용 시인의 생질을 만나려는 노력을 할 때,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사재임 당시 맡은 반 아이 중 하나가 바로 정지용 시인의 외증손이란 사실이다. 퇴근 후 때아닌 가정방문을 했다. 과자 봉지 사 들고 우리 반 최임혁이네 집을 찾았다.
그의 아버지 최성준 씨를 만났다. 시인의 유일한 외손자다. 시인의 따님이며 최성준 씨의 어머니인 정구원 씨는 서울에서 홀로 거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용제에 가족이 모두 참여하니 거기서 만나자 했다.
지용제에서 만난 정구원씨는 단아한 모습에 퍽 고와 보였다. 인사 나누고 다섯 시간을 함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신의 유일한 손자 담임이라니, 더 성의껏 맞이해 주었다.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고 말하지 못한 가족사 이야기에선 눈물까지 비쳤다.
정지용 시인은 월북작가란 굴레를 써 그의 가족들은 음지에서 생활해야만 했단다. 정구원씨는 논산으로 출가한 고모댁에 얹혀 살았다.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했기, 제대로 된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했단다.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큰아들 구관씨가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자진 월북이 아닌 강제 납북으로 밝혀져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된 향수의 시인 정지용! 대중가요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에 의해 불려지는 ‘향수’는 오늘도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도시샤대학 교정 한쪽에 건립된 정지용 시비 앞에서 향수를 흥얼거려 보았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요, 언어의 연금술사로도 불리는 정지용 시인은, 넓은 세상으로 나와 폭넓게 교유하며 꿈을 키웠을 것이다. 아름다운 시를 통해 인간의 고운 심성을 노래했을 것이다.
한국 전쟁이 없었다면, 시인은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제2 제3의 향수가 탄생해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안겼을 것이다. 충주고등학교 학생이 바친 꽃바구니가 시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민족시인 윤동주
매일 아침 인왕산 숲길을 걷는다. 집을 나서 수성동 계곡을 지나 시인의 언덕까지 다녀오는 코스를 즐긴다. 수성동 못미쳐 누상동 민가 담장엔 ‘윤동주 하숙집터’란 표찰이 붙어있다.
연세대학교 4학년 때 후배 정병주와 하숙한 소설가 김송의 집터임을 알려준다. 윤동주는 여기서 ‘별헤는 밤’. ‘서시’, ‘또 다른 고향’ 등 주옥같은 시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짧은 하숙 생활이었지만, 주인 내외와 하숙생 둘은 정말 멋있는 생활을 했단다.
집주인 소설가 김송, 성악가 김송 부인, 시인 윤동주, 국문학도 정병욱 이들 넷이 엮어내는 삶은 문화와 지성의 하모니였을 것이다.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시비 앞에서 서시를 음미한다. ‘하늘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별헤는 밤을 흥얼거린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 표지석 앞에 선다. 그의 고향 용정에서 가져온 흙과 우리 흙을 섞어 놓았다는 자리를 응시한다. 못다 이룬 꿈을 안타까워하며 구천을 맴돌고 있을 시인의 넋을 위로한다.
시인 윤동주는 시대의 희생자다. 젊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민족시인 윤동주! 시에 민족의 자강을 독립을 염원하는 뜻이 담길 수 있다. 그걸 반일 행위로 몰아 목숨을 앗아가다니, 일제의 만행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도시샤 대학 윤동주 시비 앞에 섰다. 조국의 학생이 바친 꽃다발과 추도문이 있다. 하나같이 시인을 그리워하며,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았다. 선진 문물을 체험해 더 높은 꿈을 실현하겠다는 조선의 지조있는 청년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분명 비극이며 분통 터지는 일이다.
시인이 떠난 지도 한 세기가 가까워온다. 이제 아픔을 털어버려야 한다. 언제까지나 끌어안고 갈 수는 없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 윤동주 시비 앞을 떠나며, 시인의 후배 정병욱 교수가 쓴 수필 ‘잊지 못할 윤동주’ 의 내용을 떠올려 본다.
오똑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을 가진 미남이라 정병주는 평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의 멋쟁이라 말했다. 정병욱의 수필 끝 구절을 소개함은 시인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다.
이제, 동주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즐겨 외는, 그의 대표작 ‘별 헤는 밤’ 의 끝 넉 줄은, 단순히 시구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북간도 용정에 있는 동산 마루턱에 묻힌 그의 무덤 위에는 이 봄에도 파란 잔디가 자랑처럼 돋아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주는 멀리 북간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 속에 배어 있는 겨레 사랑의 정신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수은 강항과 후지하라 세이카 첫 만남의 상국사(相國寺)
상국사는 조선에서 하사한 밀교대장경 및 경전을 소장했던 사찰로 일본 교토에 소재한다. 1392년 무로막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건립했다.
그는 1398년 상국사 북쪽 산기슭에 북산전(北山殿)을 완공해 거주했다. 당시 상국사 승려들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지식인으로 막부의 외교를 맡았다. 따라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고 사신으로 파견된 것도 상국사 선승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가 임진왜란 시 조선의 고서를 약탈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 조선의 선진문명에 대한 갈망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좌( 강항에 의해 후지와라 세이카로 개명)는 일찍이 고향 떠나 교토로 가 상국사 선승이 되어 유학을 갈망했다. 당시 명나라로 유학을 희망했으나 병으로 실패하고, 강항을 만나 일본교육의 반석이 된 일본유학을 체계화 할 수 있었다.
중국의 주자학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 독학으로 공부를 한 그는, 일본인으로 한문으로 쓰여진 주자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는 주자학 자체가 형이상학적이며 난해한 학문이어서다.
후지하라 세이카는 강항을 만나 학문을 익히고 부족한 부분을 필담으로 채워가며, 스승과 제자로서 인연을 맺고 1600년 5월 강항 일행이 귀국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후지하라 세이카의 시를 통해 당시 스승인 강항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살펴본다.
數莖叢菊色交奇(수경총국색교기) 가지가지 국화빛이 알뜰히 얽혔으니
遠客新題亦自宜(원객신제역자의) 멀리서 오신 분의 새 글제가 더 좋아보이네
節義高秋霜露底(절의고추상로저) 가을 서리 맞았거늘 높은 절의 내 아노라
對花猶道是吾師(대화유도시오사) 꽃을 보고 이르는 말 내 스승 아닐소냐
후시미 성터로 오르는 계단
수은 강항! 오즈성에서 교토 후시미성(복견성)으로 강제로 이주당해 상국사 선승 후지하라 세이카와 교류하며 일본 유학 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강항 선생과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풍국묘>를 둘러 싼 극적인 대화를 하나 더 얘기해 본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죽자 그를 북문 밖에 묻었다. 그 위에 황금전을 짓고 왜승 남화가 글을 지어 문 위에 큰 글씨로 써 붙였다.
大明日本 크게 밝은 일본이여 / 振一世豪 한세상 호기로움 떨쳐라
開太平路 태평의 길을 열어놓아 / 海濶山高 바다 넓고 산 높아라
강항은 도요토미의 풍국묘에 갔다가 큰 붓으로 박박 그어버리고 그 위에다 이렇게 써 놓았다.
半生經營土一杯 반평생 동안 한 일이 흙 한줌인데 / 十層金殿謾崔嵬 십층 금전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거야
彈丸亦落他人手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고 말았구나 / 河事靑丘捲土來 어찌하여 청구 땅을 넘봤단 말이더냐!!
후지하라 세이카가 이 일이 있은 후 강항 선생에게 찾아 와, 지난번에 태합의 총전(풍국묘)에 붙은 글씨를 보니 바로 선생의 글씨였습니다. 왜 스스로 몸을 아끼지 않으십니까? 그토록 그리던 조국으로 되돌아 가시려면 목숨을 보존하셔야 되겠지요? 라고 탄식했다. 그 이후 강항 선생은 <종오소호>정신을 실천하듯 다른 결심으로 옮겨간걸로 추정한다.
다수의 왜인들을 위해 강항은 후지하라 세이카에게 조선의 과거제도와 춘추 석전(釋奠) 의례를 설명하고 유학 경서를 써 주었다. 이 무렵 전수한 학문이 주자의 주석에 따라 훈점(訓點)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인데, 이는 강항이 만든 일본 최초의 유학 텍스트북이 된 <강항휘초>이다.
후지하라는 강항의 지도를 받으면서 조선 신유학에 빠져들자 승복을 벗어 던지고 강항에 의해 심의(深衣)로 갈아 입고 유학자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조선 신유학의 진수를 온몸으로 터득하고자 하였고, 평소에도 유건(儒巾)을 쓰고 있을 만큼 명실상부한 조선 신유학의 신봉자였다.
일본 땅에 붙잡혀간 수은 강항 선생의 발문으로 <강항휘초> 중 ‘사서 오경’ 아홉 책의 방대한 내용을 단 한 자도 틀리지 않았던 비결은 무엇일까? 누가 뭐래도 학문에 대한 심오한 깊이와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예로 강항이 7세 때 맹자(孟子) 7권 1질을 한나절에 통달하자, 책장수가 신동으로 알고 한 질을 선물하려 하였으나 끝까지 사양하므로, 이를 정자나무에 매달아 놓고 갔다 하여 이곳을 맹자정(孟子亭)이라 한다 라는 전설처럼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수은 강항의 문재가 뛰어나는 걸 증명하는 일화라 하겠다.
강항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우리의 전통 교육 방법은 ‘백독백습’ 이었다. 백번 읽고 백 번 쓰라는 것이다. 그만큼 많이 읽고 쓰라는 뜻이다. 그런데 강항은 이를 뛰어넘어 천 번 읽고 천 번 쓰는 노력을 한 것 같다. 강항이 후지하라를 위해 신유학을 전수한 글 총 <강항휘초>16종 21책이 현재 일본의 국립 공문서관 내각문고와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강항의 표현을 빌어 후지하라 세이카에 대한 인물평을 살펴보자.
"교토에 온 뒤로 왜국 실정을 알기 위해 왜승들과 교제했다. 그 중에는 글도 알고 이치도 아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의원 노릇도 하는 이안, 리안도 가끔 나를 찾아왔다. 또 묘수원의 순수좌가 있었다. 그는 후지와라노 데이카의 자손으로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스승이다. 사뭇 총명하여 옛글도 잘 알아 통달하지 않은 글이 없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왜인들 사이에 잘 끼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걸 들은 후, 교토에 집을 짓고 해마다 쌀 2천석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후지하라 세이카는 집도 쌀도 받지 않고 오바마 성주 기노시타 가쓰토시, 아카마스 히로미치와 교유할 뿐이었다."
백제 장인이 지은 일본 최고(最古)의 사찰 시텐노지
둘째날이 밝았다. 짐을 정리해 차에 싣고 첫 번째 답사지 오사카 시텐노지를 찾았다. 시텐노지는 사천왕을 모신 일본 사찰이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외호신을 가리키는 불교용어다. 여기서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으로 동서남북의 네 곳을 지킨다.
우리 사찰은 부처님을 모시지 사천왕을 모시지는 않는다. 우리 전통 사찰의 경우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거쳐 법당으로 간다. 여기 일본 사찰은 천왕문에 사천왕상을 봉안하고 있다. 보통 사천왕상은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잔뜩 치켜올린 검은 눈썹, 크게 벌어진 빨간 입 등 무서운 형상에 손에는 큼지막한 칼과 창을 들고, 발로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때 발밑에 깔린 마귀들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찰은 대부분 산에 있다. 유명 사찰이라도 한 번 찾으려면 큰 맘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 사찰은 마을에 있다. 주민과 함께 한다. 사찰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곳에 더해 공원 역할까지 하는 곳이라 그러하다는 최금환의 설명이다.
이 사찰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라 하니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사찰로 보인다. 경내가 넓고, 건축물이 많으며, 잘 꾸며놓은 정원이었다. 시텐노지는 593년 쇼토쿠 태자가 백제 장인 3명을 데려와 지은 사찰이다. 남대문, 5층탑, 금당(본당)의 일렬 배치를 일인들은 시텐노지 양식이라 한단다. 그러나 실제론 백제의 전통 사찰 양식인 것이다.
불교, 한문, 사찰 건축법 등 어느 것 하나 백제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게 없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분명 문화 선진국이고 그네들은 문화 후진국이었다. 따라서 스승 국가를 침략하고 함부로 대함은 천륜을 어기는 행위임을 깊이 반성해야 옳다고 본다.
수은 강항 선생께서 정신문명이 뒤떨어진 일본 사람들에게 <강항휘초>로 가르침으로써, 사람이 가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해 주었음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일부 의식 있는 오즈시 식자층에서 1980년 무렵 수은 강항 선생 일본연구회를 조직 활동하고 있어, 바람직한 계승사업이라고 여겨진다.
시텐노지 건물은 전화에 의해 소실되어 새로 지은 것이란다. 그러나 웅장하고 화려하며, 잘 보존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5층탑이 멋스러웠다. 연못과 건출물의 배치가 자연스럽게 잘 어울렸다. 소원을 비는 일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시텐노지 앞 마당에선 매달 21일과 22일에 장이 열린다고 했다. 그런데 25일인데도 난전이 펼쳐져 있었다. 먹거리와 옷가지 종류가 많았다. 충식 아우가 과자를 사왔다. 어찌나 딱딱하던지 먹는 데 힘이 들었다. 딱딱한 과자는 변치 않는 불심을 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불국정토가 펼쳐질 날을 고대하며 발길을 돌렸다.
일본의 원한! 오사카성
우리는 외침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 일본은 우리와 다른 이유에서 성을 쌓은 것 같다. 그들은 이렇다 할 외침을 받은 일이 없잖은가? 그러면 각 지역을 분할 통치하는 다이묘들 간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성을 쌓은 것으로 판단된다.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한 축성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오사카성은 읍성이다. 우리는 산성이 주인데, 오사카성은 시내 중심에 있는 평지성이다. 우리의 삼대 읍성인 승주 낙안읍성, 고창 모양성, 서산 해미읍성과 비교해 보았다. 우선 규모면에서 차이가 난다.
오사카성이 훨씬 넓고 훨씬 높다. 오사카성은 해자가 넓고 깊다. 배를 타고 성을 감상하는 걸 보았다. 우리 성곽의 해자는 좁고 얕은 데 말이다. 성을 쌓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위용의 상징처럼 생각되었다.
작지만 우리나라 성은 아름답다. 하여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준다. 교사시절, 해미읍성을 내 반 아이들과 함께 찾아 답성을 했다. 성곽 위에 올라 한 바퀴 돌며 충무공도 한 때 근무한 곳이기에 충무정신을 설명한 기억이 난다.
애국애족(愛國愛族), 자주자립(自主自立), 창의창조(創意創造), 염결무사(廉潔無私), 감투필승(敢鬪必勝)의 5대 충무정신은, 우리가 가난을 벗어나 근대화로 가는 데 중요한 가치였다는 생각이다. 잘살아보겠다는 신념 하나로 허리띠 졸라매며 삼천만 국민이 피땀 흘려 일한 건 바로 충무 정신이 국민들 가슴에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고창읍성은 밖으로 난 길을 돌며 감상했었다. 각 구역마다 축성에 동원된 지역을 표시해 놓았다. 후시미성을 쌓는데 공기를 단축키 위해 백성을 혹사시킨 일본 관리를 크게 질타한 강항 선생을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역사를 유추해 보면 고창읍성은 일본인들같이 백성을 혹사시켜가며 성을 쌓지는 않았던 것이다.
낙안읍성은 주민들이 생활하는 성이라 더욱 정감이 간다. 성안 가게에 들러 막걸리 잔 기울이는 맛 절로 기분이 나는 곳이다. 전쟁을 막기 위해 쌓았던 성곽이 평화의 시대를 맞아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변했으니,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 허다하다.
강항로드 탐방단 일행은 주변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 천수각에 앞에 이르렀다. 지상 50m의 거대한 건물이 위용을 자랑한다. 많은 관광객이 매표소 앞에 길게 줄지어 있다. 오사카성 천수각이 인기 있는 관광지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천수각(天守閣)은 일본의 전통 성곽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말한다. 한 마디로 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 하겠다. 천수각은 망루이다. 적의 기습과 외부 상황을 살피기 위한 초소라 해도 되겠다. 또한 성주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크고 웅장할수록 주인의 권력이 강하다는 걸 나타낸다. 오사카성 천수각이 이처럼 웅장한 건, 성의 주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것같이 높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보아야겠다.
우리는 맨 위층부터 전시물을 감상하며 내려오는 방법을 택했다. 맨 꼭대기 전망대에 올라 오사카성과 오사카 시내를 조망했다. 오사카성은 넓은 공원이다. 잔디와 꽃과 나무가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했다. 오사카 시내는 고층빌딩이 즐비하다. 도쿄에 이은 일본 제2의 도시다웠다. 재일교포도 동경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거주한단다.
아래로 내려오며 각 실에 전시돼 있는 내용을 살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 오사카성의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활동할 당시 시대상, 오사카성에 대한 정보, 영상실, 기념품 판매점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천수각 감상 내내 한국인인 입장에선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우선 성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강해서다.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로 일본인 시각에선 영웅시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시각에선 임진왜란을 일으킨 한낱 전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탐방단 일행은 오사카성 성내에 있는 일본 육군 위수형무소 터를 찾았다. 중국 상해에서 의거 후 여기 형무소로 이감 한 달간 수감됐던 매헌 윤봉길 의사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형무소 터는 말이 없었다. 윤봉길 의사 관련 어떤 표식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표지판에 감옥터라 되어있기 여기서 고생하셨구나 하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1931년 4월 29일 대한의 의로운 청년이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행사에서 본부석에 폭탄을 던졌다. 일본 총사령관과 거류민단장이 죽고, 몇 고위급 장성은 부상을 당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쾌거다.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에 잡힌 윤의사는 왜 중국에서 형을 집행하지 않고 일본으로 왔을까?
여기서 당시 일본 지도층의 대인답지 못한 치졸한 행동을 질타하지 않을 수 없다. 위수형무소터는 육군 4사단 터란다. 그런데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당한 사상자 중 한 사람이 여기 4사단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 그 앙갚음으로 여기에 수감했다는 사실이다.
윤 의사의 사형 집행 장소인 가나자와는 또 어떤가? 윤 의사의 폭탄에 중상을 입은 우에다 9사단장의 보복성 조치다. 즉 9사단 본부가 있던 가나자와에서 윤 의사를 사형 집행했으니, 한 마디로 인간 이하의 저질 행위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 본연의 양심이란 걸 잊고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수은 강항 선생은 성리학을 전했다.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인 사단과 칠정을 강조했다.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능력을 말한다.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표현되는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惡), 욕망(欲)의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건, 아니 문명인과 미개인이 다르다는 건 바로 사단칠정의 성리학적 가치를 알고 실천하느냐 여부에 있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수은 선생은 미개국 일본인들을 교화시키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랑(지성성)과 배려의 정신인가 말이다.
윤봉길 의사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한학을 수학했다. 그리고 농촌, 농촌 사람들의 의식과 환경 개선을 위한 계몽 활동에 헌신했다. 자신의 집에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 운동을 했다. 오늘날의 농업협동조합 성격의 농촌 개혁 운동을 했다. 농산물 소득 증대 노력과 제값 받기 운동을 선도했다.
일제는 윤 의사의 활동을 감시하고 옥죄어오자, 중국으로 건너가 백범 김구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이고, 홍구공원의 의거로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천하에 선보인 것이다. 일본 육군 위수형무소는 오늘도 침묵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다음호에 이어서 게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