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모이야리 지장보살상이 세워진 표지판의 글 중 가장 핵심의 글은 이렇다.
“...のちに京都い移った義けは 藤原怪窩に懦教を伝え、日本懦学の조となつた。...”
굳이 해석하자면
“그 후 교토로 이송되어 간 義의 인물(강항)은 등원성와에게 유교를 전파하고, 일본 유학의 시조가 되었다...“로 해석된다.
이처럼 일본유교를 전파한 인물에 대한 사료(史料)적 가치가 있는 글을 최근에 접했다. 모 언론에 기고(起稿)자 일라의 글을 <일본(왜국倭國)서 출세의 신으로 부활한 수은 강항!>을 통해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의 대(代)와 세(世)를 헷갈리듯 유교(儒敎)와 유학(儒學)의 의미를 혼돈(混沌)해 편의대로 사용한다.
그래서 비슷한 용어로 알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그 잘못된 사용을 올바르게 다시 짚어 보고자 한다. 유교는 인의(仁義)사상을 근본으로 정치와 도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유학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유학은 유교라는 범주 안에 포함된다.
그래서 당연히 강항이 일본에 전수한 것은 넓은 의미로 유교의 사상이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음을 위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협의(狹義)로 사용되는 주자학 전수니 성리학 전수니 하는 말은 옳지 않다. 굳이 사용하고자 한다면 ”조선의 유학인 신유학과 제례문묘, 심의(深衣)를 강항이 전수했다!“ 라고 말해야 그나마 옳다.
그런데 굳이 강항을 이처럼 작은 굴레와 멍에에 가두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첫째는 몰라도 너무 몰라서 혼돈에서 오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두 번째가 일제(日帝)가 피로인(被擄人)에게 지금의 일본이 탄생되어진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됨이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5년 해방 무렵 일본 순경이 나서『간양록』을 금서(禁書)로 지정했다.『간양록』을 닥치는 대로 압수해 분서(焚書)를 감행했다. 수은 종가에서는 이『간양록』을 지키기 위해 콩나물시루에『간양록』책을 메달고 그『간양록』책자 아래에는 왕겨로 습기가 차지 않도록 보관했다는 일화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 진다.
이토록 수치스러움이 탄로가 날까봐 조바심을 냈던 일본은 강항이 퇴계의 제자라 날조해 우겼다. 그러면서 일본의 유교는 조선의 대학자인 퇴계나 조선통신사를 들먹거리며 주자학의 전수를 소리높여 우기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외에도 양명학(야마자키 안사이, 나카에 도주 등)까지 동원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다.
그로 인해 대표적인 용어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게 강항이 왜국에 <주자학 전수>라는 굴레의 속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주자학 전수> 부분만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작은 부분이니까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더 큰 틀로 들어가 보자.
강항은 왜국에 1597년 9월부터 2년 8개월간 피로되어 있으면서 『강항휘초』 16종 21책을 후지와라세이카에게 전수해 줬다.
『강항휘초』라는 말의 의미는 강항이 필사해 왜국에 발문한 책의 묶음을 말한다.『강항휘초』의 종류는 [사서오경]을 비롯해 [곡례전경], [소학], [근사록], [근사 속록], [근사 별록], [통서], [정몽] 등이다. 그 『강항휘초』수진본이 일본은 국보로 여기며 지금 동경(도쿄)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 수장되어 있다.(2019년 6월 확인)
그런데도 학자들이 과연 주자학만을 전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르면 공부하거나 현장을 찾아 견문을 넓혀야 한다. 학자가『강항휘초』도 모르고 강항의 저술서를 총체적으로 찾아보지도 않고 단편적으로 기술하면 그게 역사가 되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강항은 주자학만 전수한게 아니고『강항휘초』를 심의와 제례문묘를 포함해 반듯한 대한민국식의 K-유교를 왜국에 전파한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역사를 바로 알자!
올바른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족적을 따라 현장을 찾아가는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학자라도 학자로서 학자다운 어깨의 무거운 책임감과 맡은바 소임에 따른 중압감을 느껴야 한다.
여기에 유엠 부틴(부찐)사학자의 한마디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러시아 역사학자 유 엠 부틴의 고조선 연구 : 고조선-역사 고고학적 개요>
유엠 부틴은 소련의 사학자로 풀네임은 유리 미하일로비치 부틴(БУТИН Юрий Михайлович)이다. 그는 러시아에서의 고대사 세미나 중 한국사를 비판해 말했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 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 할 수가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단군 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그의 지론이다. 단군 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고대사는 해석할 수가 없다는 견해이기도 하다. 그 유엠 부찐 사학자는 이러한 비평에 멈추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인>이라며 아래와 같이 거듭해 말했다.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이다.”라 했다.
참으로 듣기 거북하고 민망스러울 정도로 부끄럽다. 내 편이 아니면 단순한 틀린게 아니라 다름의 네편이 아니다. 그 즉시 적이 되는 그런 일부 소수의 민족성이 부끄럽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전쟁과 수난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아부와 아첨을 해야 살아남는 그런 사람이 비일비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투박한 토양에서 그나마 이만큼의 민주주의가 커가고 있다는 것도 민족의 장점일 것이다. 혹자가 말하듯 어쩌면 1910년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이 되었을 때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한 게 비정상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친일파가 경제사회에서 득세하고 뉴라이트가 정치 세력으로 까지 굳혀 가 독버섯처럼 사회에 병폐가 된다.
그러면서도 위안을 가져 보는 건 네팔(नेपाल / Nepāl)국가의 큰재앙을 보는 눈이다. 그 거대 빙하에 의한 산사태도 어디 하루 이틀만에 정리될 사안인가. 하물며 9천년 역사를 논하는 시점에서 9천분의 1에 지나지 않는 잘못된 그 시대의 사학자들로 인해 낙담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당연히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위안이 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한 세대가 지나고 또 한세대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사악(邪惡)함이 정리되어야 하는 민족관과 역사관이 존재할 수 있다. 몸의 때를 씻고 또 씻어낸다 한들 그 몸의 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더더욱 발꿈치에 달라붙은 군살같은 때는 어디 쉽게 제거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인고(忍苦)의 세월이 가듯 계속해 씻어내고 또 거듭 깎아 내어야만 할 것이다. 신체의 때를 정기적으로 씻어내듯 무시로 참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그게 혁신의 정책이 되고 또 다른 혁신이 와 언제가는 찬란한 봄이 우리 민족혼을 달맞이하듯 일깨워 우리 앞에 다가올 날이 있을 게다.
봄이 온다고 그냥 오는게 아니듯 찬란한 봄은 준비없이 마냥 기다린다고 오는 것은 아니다. 찬란한 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혹독한 겨울을 잘 이겨내고 오는 봄을 나름 찬란하게 맞이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잔인한 봄이 아닌 찬란한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비틀어지고 왜곡된 역사는 언젠가는 바로잡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역사의 현장답사와 모임체의 논의가 필요로 하는 곳에서 관심가짐이다.
감히 종지부에서 묻는다.
“지금 그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