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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야마 교수의 『간양록』 연구로 본 <강항 일본유교 전수>

강항,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인 등원성와 문집과 임라산 문집에 영향을 줌...일본 유학의 효시(嚆矢)인 『강항휘초』의 일부의 사서오경 간행.
등록날짜 [ 2026년09월14일 08시26분 ]
 
강항로드탐방단(단장 강대욱)에서는 지난 2019년 6월 19일 오후 2시에 일본에서 수은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본보 기사 <edaynews.com/detail.php> 참조
 
 일본 교토지역은 8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일본의 ‘천년 수도’로서 정치 중심지인 동시에 문화·예술·종교의 중심지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온 대표적인 도시다. 또, 교토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귀족 문화와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 문화가 만나 다도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와 건축 양식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시인 교토 류코쿠(용곡)대학 제2세미나실에서 수은강항선생 국제학술대회를 오사카, 에히메현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와 대한민국의 유림, 일본인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당시 개최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강항이 1597년 2차 조·일전쟁(정유재란) 때 영광 논잠포에서 왜수군에 피로되어 2년 8개월 동안 왜국에서 체험하고 이룩한 내용을 중심으로 개최됐다. 당시 발제자로 나선 오카야마 전 천리대학(天理大學) 교수(북한 억양의 말씨로 일본인이라 자칭함)가 『간양록』 연구(藤原惺窩와의 관계를 중심으로)로 심층 연구해 제시했다.
오늘은 그가 발제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지성인들과 학자들의 고착된 사고(思考)에서 양심을 밝혀 깨우치고자 한다.

우리는 왜 일본학자를 정통으로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참된 역사는 자료 부족 또는 근거가 바람직하지 않다며 부정적이면서 믿지 않으려고 할까. 식민사관인 <유명인사=일본인>이라는 도식을 왜 깨뜨리지 못하고 식민근성으로 살아가려는 것일까. 흔히 우리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라는속담을 자주 인용해 속성을 판단한다.

여기에 더불어 자주 반복되는 일본인의 속마음을 감춘 이중성에 속지 말아야 한다.
 
오늘 일본인들의 잔인성, 사악함, 간교함은 백일하에 여기서 다 밝힐 수 있다. 그렇지만 지면 관계상 그 일부만이라도 우선 말해 그들의 이중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국화와 칼』 (일본 문화의 양상)저자: 루스 베네딕트, 도쿠가와 이에야스(야마오카 소하치 대하소설) 『대망』, 731부대 영화, 한일강제합병의 경술국치, 고대 역사서와 한국사 분서(焚書)사건, 성노예라고 당당하게 밝히지도 못하는 위안부 피해자 증언, 일제강제징용자들의 증언 등등 그 극악하고 사악함의 자료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도 이러한 진실된 역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아예 못 본 체하고 왜 남의 일처럼 지나치는 것일까. 아니면 역사를 자기만이 갖고 있는 독창성을 우수성으로 범인(凡人)들을 통해 객관화하지 못하고 왜 노예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일까.

올바른 역사를 위해 한 줄기 빛을 보듯 스토리텔링하거나 구전되어 내려오는 역사를 제시하면 구전이나 증언은 무시할까. 그들은 왜 일본의 학자들처럼 매양 증좌(證左)와 자료 부족을 들이대는 것일까. 
 
혹자는 꺼져가는 등불을 소중히 지키려 하듯 참 역사를 지키려고 연구를 집대성하면 상대를 견강부회(牽强附會)로 폄하하는데 더 초점을 맞춰 나서는 고약함이 있다. 
 
그러면서 높이 형성된 본인의 고견(高見)도 버리고 알량한 역사를 말하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끌려가는 경우가 노출되기에 이른다. 그러하기에 그 일본인들이 날조한 책을 마치 커다란 보물 더미 같이 여기며 고가에 매입하는 모습은 딱하기 그지없다.

물론 그 서책으로 냉철하게 사리를 판단해 역사 오류를 자체적으로 발견해 냄에 기대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날조된 역사는 조금만 더 들여다봐도 금세 그 민낯이 밝혀지는 게 널브러지게 많다.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조각들이 임나일본부설이요 광개토태왕비의 교묘한 글자 수정 또는 삭제 사건이다. 이처럼 그들이 제아무리 문화유산, 고서적, 고문서에 손을 데도 그 올바른 역사는 결코 손바닥으로 감춰지지 않고 영원히 숨겨질 수도 없다.
 
아무리 숨기려고 발악을 해도 그들만의 민족성에 의해 더 그러하다. 일본인의 인간 본성을 알 수 있는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더 그렇게 조작이 들통이 난다. 어떻게 각각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라는 개념으로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일까. 좋으면 좋은 것이고 싫으면 싫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언어표현 역시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와 작용된다. 겉마음인 다테마에(建前)과 속마음인 혼네(本音)가 존재한다는 게 역사를 바라보는 참역사 앞에서도 얼마나 이중성이 작용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왜곡된 역사가 더 끔찍하기 그지없다.
 
일본 에히메현 오즈시에 가면 오즈시민회관과 오모이야리(히치강 해변지역)의 두 지역에서 강항의 위대함의 평가는 자못 다르다. 

오즈시민회관에는 <홍유 강항현창비>가 1990년에 양심이 깨어 있는 일본인 중심으로 세워져 <거유=강항>으로 큰 학자임을 표상하고 있다. 그런데 오모이야리(히치강 해변)지역에 가면 융성했던 불교의 국가답게 <강항 지성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면서 <강항 출세 지장보살상>으로 빨간색 현수막을 자랑스럽게 게첨해 강항에게 은덕(恩德)을 빌면 출세를 보장하는 신으로 숭상하도록 되어 있다.
 
어린 시절 조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삼촌, 당숙들에게 자랑스럽게 듣고 자랐다.

매일같이 찾아와 조부님께 바둑을 배운 아비루 일본 순사가 영광지역 아리랑고개에 도착하면 말에서 내려 큰 절을 하고 동네에 들어왔다는 것! 또 하나는 조부님께서 허준의 『동의보감』을 통독하시고 한의학 서적을 저술하셨을 정도로 인체 의학에 밝으셨다는 것이었다. 이 두가지 모두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의 족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마찬가지 논리다. 강항선생을 한 켠에서 <홍유 강항>이라고 칭송한다면 그 역시 좋다. 그런데 다른 켠에서 <강항 출세 지장보살상>이라 하며 <일본 유교의 비조! 강항>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도 진실되고 생생한 역사의 증언이라 생각되어 매우 흡족하다. 결국은 일본에 유교는 강항이 전수했다는 것이 양쪽에서 맞불처럼 강항선생 선양에 대한 참 역사의 증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하듯 당시 2019년 6월 오카야마 교수는 학술세미나에서 발제문을 통해 가장 먼저 제시한 것 역시 강항이 순수좌의 스승이었다는 연구발표가 주제요 화두였다. 
 
물론 여기서도 많은 오류와 자기네식의 방어논리가 보인다. 하지만 그나마 스승 강항에게 향한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계속해 들여다보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일본 근세(江戶)유학·주자학의 開祖라고 불리는 藤原惺窩의 문집이나 그의 문인 林羅山(1583-1657년)문집에 기록된 藤原惺窩 스승의 행장에서는 ‘朝鮮刑部員外郞 姜沆’으로 직위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강항과 藤原惺窩의 관계로 부터 일본 주자학의 효시가 되는 사서오경의 간행이 이루어지는 과정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일본에서 강항의 이름이 연구서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井上哲次郞의 『日本朱子學派之哲學』(明治38년(1905)부터다...”라고 서두(序頭)를 열었다. 
 
이어 “藤原惺窩는 원래 승려로서 豊臣秀吉·德川家康에게 유학을 강설하였으며, 에도(江戶)초기의 신유학·주자학 발전과 확립에 크게 공헌한 門弟들(임라산·마츠나가 샤쿠고 林羅山·松永 尺五 등)이 있어 일본 주자학의 開祖라고 불리우는 유학자이다. 강항이 피납되어 일본에 억류중에 藤原惺窩을 만나게 되어 강항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藤原惺窩는 강항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유학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라고 발표했다.
 
오카야마는 ‘강항과 순수좌는 사제지간이었다!’ 라며 주장을 계속했다.

“왜승이 낡은 병풍에 흰 국화와 목련과 나팔 꽃 등을 그려놓고 강항에게 제시(題詩)를 청해왔기에 두 편의 시를 지어 적어 주었는데 그 때 순수좌도 이 시에 화답하여 한 수 를 지어 다른 화폭에 적었다고 한다. 그 시의 마지막 구에 ‘이 꽃을 대하면 내 스승이라 부르네(對花猶 道是吾師)’라고 하여 순수좌는 꽃을 강항에 비유하며 스승으로 부르고 있다고, 또는 부르겠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사서오경의 정서(淨書)와 왜훈을 달게 해주고 난 후의 일일 것이다...”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오카야마는 “순수좌가 생각하는 강항에 대한 글인데. 스승으로 부르겠다는 의사표시가 담겨진 시로 파악된다. 아마도 사서오경의 왜훈독이 끝난 후의 시로 생각되는데, 이 시기는 강항이 <오경발(五經跋)>을 적은 경장(慶長) 4년1599년 2월 이후일 것이다. 네 번째는 순수좌가 왜장들을 도적(日本長官,盡是盜賊 云云,< <壬辰丁酉入寇諸將倭數>)들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전술한 대로 전쟁으로 인한 일본백성의 시달림을 구제하려는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올바른 역사를 문적을 비교해 가면서 밝혔다.
 
오카야마는 강항이 유교의 완성이라 했다.

거기에는 신유학과 제례문묘 그리고 심의(선비한복)를 전수했다는 논리가 배어 난다.
 
“또 일찍이 우리나라(조선) 《오례의(五禮儀)》ㆍ《군학석채 의목(郡學釋菜儀 目)》 을 얻어서 그의 사읍(私邑)인 단마(但馬)를 독려하여 공자의 묘(廟)를 세우고 또 우리나라 제복(祭服)ㆍ제관(祭冠)을 만들어 날을 걸러 그 부하를 거느리고 제의(祭儀)를 익혔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어, “<姜沆筆談>,<五經> 跋文,<文章達德綱領>서문,<是尙窩記>,<惺齋記>등은 활자화되어『藤原惺窩集』·『藤原惺窩先生文集』등에 게재 되어 있다. 그리고, 경서류의 필사본으로는 수진본(袖珍本)인 사서오경(9종15책)과 性理諸書 (8종9책)이 국립공문서관의 內閣文庫에 현존하고 있다..”라고 그들에게 전수한 『강항휘초』 16종 21책 부분도 밝히고 있다.
 
다음은 강항의 절의(節義)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강항은 여전히 조선의 의복을 입고 적에게 굴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충신’이라고(且言: 姜沆 猶着朝鮮衣服, 不屈於賊, 眞箇忠臣)절찬하고 있다.

강항의 이런 일본에서의 모습은 해사록『海槎錄』에서도 ‘왜인들의 말에 의하면, 강항이 포로되어 온 지 5년 동안 형체를 고치지 않고 의관을 변하지 않으면서 방에 조용히 앉아 책이나 보고 글을 짓기만 일삼고 운운(倭中言, 姜沆作俘 五歲, 不毁形體軆, 不變衣冠, 靜處一室, 只以看書綴字爲事)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강항은 일본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선비의 의지와 체통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알 수 있다...”라고 전했다.
 
이어서 이번에는 일본인들로부터 해동 강부자(海東 姜夫子)로 불리는 강항을 연상시키는 조선통신사의 기록을 밝혔다.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왜인들이 그의 절의를 몹시 칭찬하였는데, 심지어는 소무(蘇武)와 문천상(文天祥)에 게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이를 듣고서 가상히 여겨 탄식하였으며, 당로자에게 글을 보내어 그를 거두어 서용하기를 권하였다...”라고 강조해 말했다.
 
끝으로 발제를 마치면서 오카야마는 
“3) 강항으로 부터 주자학의 영향을 받은 藤原惺窩가 강항을 스승(師)으로 표현한 시기는 사서오경의 왜훈독이 끝난 후 즉, 강항이 <五經跋>을 적은 慶長 4년(1599)2월 이후로 본다. 
 
4) 藤原惺窩가 四書五經의 경문에 宋儒의 뜻으로서 倭訓을 달아 만든 책은 일본에서 宋儒의 뜻을 담은 최초의 책이고, 유학의 일반화를 개척하는 일이 되어 藤原惺窩을  江戶유학·주자학의 개조라고 불리우는 이유가 되지만, 姜沆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대업이다. 藤原惺窩에 있어서 강항은 「師右」(太田兵三郞)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5)강항이 藤原惺窩로 부터 얻은 일본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간양록』에 투영되어 있으며, 조선의 문인들과 조정에서 일본에 관한 참고서 처럼 쓰여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에 간양록이 갖는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수 있다...”라고 <일본유교의 비조>가 되는 강항에 대해 대단원의 학술정리를 마쳤다.
 
오카야마는 당시 학술세미나를 마치고 남은 강항로드탐방의 여정을 함께하며 교토에서 오사카, 고치현을 거쳐 오즈시까지 강항의 일본지역 족적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발제를 위해 일본 역사학자들의 문헌과 후지와라세이카(등원성와)와 하야시라잔(임라산)의 문집을 출처로 제시했다.
 
그렇기에 더 명확하게 오늘 강항에 의해 일본 근세(江戶)유학의 개조(開祖)가 등원성와(藤原惺窩)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강항선생이 일본 유학의 효시(嚆矢)로 작용해 학문을 전수했으며 『강항휘초』를 간행해 일본유교의 비조가 되었음을 증명하기에 이르렀다는 견해를 피력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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