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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단편소설>睡隱 姜沆先生과 李氏夫人이야기

세간에 덜 알려진 민감한 사안이라 소설이 더 조심스러워
등록날짜 [ 2016년01월03일 16시04분 ]

◇ 수은(睡隱) 강항선생(姜沆先生)과 이씨부인(李氏夫人) 이야기
 

<강항(睡隱 姜沆)선생의 족보의 기록과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하였고 다큐와 픽션을 가미하여 선생의 발자취 중에 가장 인간적이고 우국충정으로 나라와 겨레를 사랑했던 마음을 선남선녀 사이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으로 표출해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했음을 미리 알려드린다.>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전라도 영광 불갑 금계(金鷄)마을에 천재 소년이 태어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닭을 말할 때 닭중에서도 가장 귀한 닭이 뭘까나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금닭(金鷄)이라고 말할게다. 그 닭이 가장 좋아하는 미물이 지네로 금계마을의 바로 뒷산의 이름이 지네 산으로 지네 능선이 있다.

그렇다면 지네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뭘까? 뜻밖에도 지네가 좋아하는 동물이 호랑이로 지네가 호랑이의 가슴살 쪽으로 파고들면 맹수의 제왕인 호랑이도 꼼짝없이 지네에게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 호랑이 중에서도 최고가 백호(白虎)다. 불갑사를 오르는 길 왼쪽에 진주 강성의 하나의 문중인 복호(伏虎)문중 즉 백호(白虎) 산이 자리잡고 있다.

일명 활산이라고도 하는데 화살을 쏘는 활처럼 휘어졌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백호가 가장 좋아하는 게 삵이다. 그렇다면 살쾡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 감이 닭이라고 볼 때 불갑마을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내어주고 살아가는 윤회의 명당터로 익히 소문난 마을이다.

이곳에 천재 강항이 한국과 일본의 영웅으로 1600년 이후에 일본인들이 해동 강부자(海東 姜夫子)라고 존경심을 표한다. 그들이 일본을 찾아온 조선통신사절단에 감탄해 마지않듯 강항은 그 고귀함으로 이 땅에 태어났던 것이다.

강항은 [맏형] 저어당 해(齟齬堂 瀣, 이이 율곡선생 문인)로부터 3세부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시시때때로 익혔다. 그러한 연유로 저어당 해는 죽는 날 까지 강항을 챙겼으며 강항 역시도 맏형을 스승처럼 따르고 존경했다.

1597년 강항의 식솔들이 왜 수군들에 의해 끌려가면서도 맏형의 형수를 챙기는 모습이『간양록』에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5형제 중 맏형과 강항의 그 끈끈한 혈육의 우애가 수은 종가 족보에 두 사람의 관계를 연벽(聯璧)으로 새겨 후대에 기록으로 남아 전해져 오고 있다. 

1571년 5세 때의 일이다. 

천재 소년 강항의 이야기가 스멀스멀 호남지역에 퍼지고 있었는데 하루는 백록(白鹿) 신응시(辛應時, 전라도관찰사·연안부사·예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대사간·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음)가 금계마을을 찾아 와 강항이 누구냐며 물어왔다.

강항이 백록(白鹿)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자 백록이 강항을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앉히고‘네가 강항이냐’고 묻자마자 다리 각(脚)자 운을 뗐다.

강항은 백록으로부터 운을 받자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더니 그 자리에서 '각도만리 심교각(脚到萬里 心敎脚, 다리가 만리를 가지만 마음이 다리를 시킨 것, 또 다른 해석 다리는 고작 만리를 향해 더디 가지만 마음은 이미 만리 그곳에 가 있다는 것)의 뜻의 칠언시를 즉석에서 지어 냈다.

순간 주변 사람과 백록이 깜짝 놀랐다. 순간 백록은 강항을 무릎에서 즉각 내려 놓고서는 경외(敬畏)한 얼굴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듯 강항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함부로 범접(犯接)할 수 없는 경지에 이미 도달하였고, 학문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로 높아 호남지역을 떠나 한양까지 신동(神童) 강항으로 입소문에 의해 전국 팔도(八道)로 번지고 있었다. 


맹자정 일화 

강항이 7세 때의 일이다. 

그 무렵에는 학문이 어느 정도 미치지 않고서는 고문서 서책(書冊)을 팔 수 없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한 서책장수가 영광 불갑면 안맹마을 현재 불갑면 안맹리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때 책장수에게 반갑게 어린 강항이 다가와 서책목록을 살펴보고서는 다짜고짜『맹자』한 질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책장수는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어린아이가 느닷없이 다가와『맹자』한 질을 보여달라고 하자 그는 한동안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책장수는 속으로‘이 놈 봐라!!’하면서 당돌함을 혼내 주고자 장난삼아 넌지시『맹자』한 질을 건네주며 골려줄 생각에만 골똘했다. 이런 책장수의 생각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일관되게 강항은『맹자』한 질을 첫 장부터 뚫어져라 쳐다보며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책장수는 그가 너무도 진지하게 자리를 잡고『맹자』에 빠져드는 모습을 그냥 장시간 쳐다보고만 있으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뿐 아니라 소년의 진지한 모습에 하도 어이가 없어 마침내 꾀를 내 한 판 승부를 걸 듯 내기를 하자고 말을 걸었다.

“암튼 꼬마야!! 네가『맹자』를 읽고 있는 모습이 제법이구나. 그래, 좋다!! 네가『맹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외울 수 있다면 이 책(『맹자』한 질)을 몽땅 주겠다. 반대로 그렇지 못할 때는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고 엄하게 말하면서 당장이라도 군밤을 줄 요량으로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어린 강항은 책장수가‘『맹자』한 질을 걸고 내기하자’는 내기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계속『맹자』책만 들여다보며 어느덧『맹자』끝부분까지 진지하게 읽어 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나절의 시간이 흘러가도 책장수는 강항의 미덥지 않은 모습에서 얼른 내기에서 이겨 강항에게 군밤을 때려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책장수는 내기마저도 응답하지 않고『맹자』책만 보고 있는 그런 강항을 머쓱하게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강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고 있어 지루함을 못 이기고 연신 하품만 해 댔다. 

바로 그때였다. 

언제『맹자』책을 봤냐는 듯 천진난만하고 밝은 표정으로 강항은 “이젠 됐어요!! 아저씨, 책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라고 말하고는 툭툭 바지를 털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고 하자 책장수는 속으로‘네가 그러면 그렇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엄하게 꾸짖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오늘『맹자』책을 걸 내기를 한걸 잊었느냐!! 이제 와서 자신이 없는 것이더냐?”며 힐책(詰責)을 하였다.

이에 강항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책장수에게“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방금 책을 읽어 보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말씀까지 드렸는데...” 거듭 책장수는 “옳거니!!” 하며 내심 쾌재(快哉)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어른인 내가 너에게『맹자』한 질을 주면서 책을 읽어 보도록 한 것은『맹자』를 다 읽고서『맹자』에 대해 암송(暗誦) 여부에 대해서 내기를 하기로 나하고 약속했잖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없는 것인게냐?” 라고 책장수는 엄하게 말하였다. 

강항은 그때서야 알았다는 듯 소년답게 해맑게 웃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방금까지 들여다본『맹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줄줄 일어 내려 갔다.

책장수는 첫 장을 넘기기가 무섭게 다음 장을 펼쳐보면서 강항이 암송하는 대로 따라 연신 책장을 넘기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언제 끝난 지도 모르게『맹자』끝부분을 읽어 내려가는 그 소년 강항을 보며 책장수는 깜짝 놀라 기겁을 하며 한동안 멍하니 강항에게 홀린 듯 소년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강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책장수에게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가 우리 동네에 들리시게 될 날을 매일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손꼽아 기다렸거든요. 제가 매번 궁금했던『맹자』를 꼭 읽고 싶었는데 비로소 오늘에야『맹자』책 한 질을 다 보게 될 줄 몰랐거든요.

다행히 오늘 아저씨가 오셔서 『맹자』한 질을 다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이미『맹자』책 한질 내용은 이미 제 머리 속에 다 들어있으니 그 책은 이젠 저에게는 필요하지 않아요.

저는 괜찮으니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다른 마을로 가셔서 서책들을 많이 파세요.”라며 소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동안 귀신에 홀린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책장수는 강항과 내기를 했지만 어른으로서 체통(體統)과 염치(廉恥)를 생각해 볼수록 볼쌍스럽고 난처해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결국『맹자』한 질을 걸고 내기를 한 그 불갑면 소재지 한 정자에『맹자』한 질을 걸어둘 수밖에 없었다.

책장수는 혼잣말로 “익히 장안까지 소문난 호남지역에 신동(神童)이 있다더니 이곳에서 내가 그 신동(神童)을 만나게 된 게야!!”고 말하면서 호탕하게 웃으며 불갑마을을 지나갔다.

그곳에 동네 사람들이『맹자』한 질을 걸어 놓은 정자(亭子)를 일컬어 맹자정(孟子亭)이라 이름 지으니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는 맹자정(孟子亭) 영광군 불갑면사무소 근처에 세워져 있다.

이 강항선생(姜沆先生)의 고향 마을인 영광군 불갑면 소재지 안맹마을에 남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이러하듯 어린 강항은 이미 학문의 깊이가 매우 높은 경지에 까지 올라와 있었다. 


강항과 공음 강목촌

강항이 8세 무렵이었다. 강항의 부친 몽오공 강극검 공은 지금까지 맏형 강해(姜瀣)에게서 글을 배웠으나 더 큰 학문을 접하게 해줘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강극검은 어느 날 강항을 불렀다.“항아, 네가 지금까지 형들로 부터 공부를 배웠다만 아직 낮은 산에 올랐을 뿐이다. 산은 자꾸 높아지고 큰 산까지 오르려면 훨씬 많은 학문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큰 학문은 큰 스승을 만나야 한다.

염산 논잠포구에서 배편 당시에는 바닷길이 실크로드였으며 지금의 고속도로 수준으로 아주 가까운 구암마을 고창군 아산면 구암포구

에 학문의 정신적(精神的) 스승인 죽곡 이장영 선생 62세에 광주 목사를 지냈으며 강항의 47세 연장자로 나중에 장인(丈人)어른이 된다

을 자주 찾아 학문을 넓혀갔다.

육로보다는 해로가 실크로드처럼 발달해 9세까지 강항은 구암 마을의 이웃 마을이자 포구인 칠암마을
을 영광 불갑 서포에서 자주 들려 닿는 칠암포구 마을로 주민들과도 자주 접했다.

이로 인해 강항(姜沆)은 이곳 구암 마을에 살고 있던 함평 이씨 부인인 죽곡 선생의 막내딸(둘째 이씨부인)과도 자연스럽게 여러 차례 소꿉동무로 자주 어울려 놀았다. 

특히 막내인 시시당 강 영은 바로 손위 형인 강항과 일가족이 모두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갈 무렵 이곳 고창의 구암마을이 천혜의 요지임을 부친인 몽오공으로 부터 익히 들었다.

시시당은 1598년 이후 신변(身邊)을 정리해 이곳 구암마을로 정착했으며 말년까지 왜적으로부터 전혀 노출이 되지 않는 천혜 자연이 베푼 은혜
의 지역적인 요소를 갖춘 이곳 구암마을에서 일평생(一平生)을 마감했다. 시시당은 어린 시절부터 강항에게 엄하게 글을 배우고 나중에는 진사(進士)벼슬까지 오르게 되었다.

강항은 7세 이후에 고창 구암마을에서 또래 아이들끼리 모여 놀기도 하면서 죽곡선생으로 부터는 학문을 연마했다. 구암 마을을 중심으로 둘러싼 산에는 괴상한 바위들이 많았다. 마을 앞에는 서해바다로 이어지는 실개천 강물이 흘렀다.

강 둑에는 자운영 독새기 같은 풀들이 파릇파릇 올라오고 있었다. 괴이한 바위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강물이 바위를 돌아 흐르는 마을 속으로 깊숙히 들어오니 웬지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강항은 구암 마을에서 마을 강가(주진천 또는 인천천이라고도 함)에 큰 바위가 흡사 서있는 사람 얼굴 같은 형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생긴 바위인지 항상 궁금해 했다. 

“이 마을엔 매우 특이하게도 여기 저기 괴이한 바위들이 많은데요. 특히 강가에 서 있는 저 큰 바위는 무슨 바위인가요?“ 

죽곡은 강항의 당돌한 질문에 너털웃음으로 답하면서 “그렇단다. 이곳 마을을 둘러싼 산들에는 큰 바위가 많고, 바위마다 재미있는 전설이 있단다.

특히 강가에 서 있는 저 큰 얼굴바위는 큰 바위 얼굴 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큰 바위 신령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신령스런 바위라서 몇 년 동안 오래 오래 보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전해 오고 있다. 너도 매일 아침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소원을 빌어 보거라.


저 큰 바위 신령님은 수천년 동안 저곳에서 저렇게 깊은 생각을 갖고 마을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지. 이곳에서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려운 일에 처하거나 각자의 소원을 빌면 저 큰 바위신령님은 골똘히 생각하여 어려운 일을 이겨갈 수 있는 가르침을 준다고 마을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믿고 있지.

또 사람들은 자기 처지를 생각하면서 고심을 하게되면 세상만사를 헤쳐나갈 수 있는 정도(定道)를 알게 된단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저 큰 바위얼굴의 큰 가르침과 신령스러움을 받아야 한단다.

적게는 개인으로부터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 까지 일을 처리할 때는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여 모두에게 공평하게, 모두에게 이롭게 처리해야 한다. 나는 네가 저 큰 바위얼굴의 큰 가르침을 받아 큰 그릇이 되기를 바란다.“

소년 강항은 죽곡 선생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먼저 큰 바위얼굴을 보고 품은 뜻을 다지며 깊이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했다.

강항은 매양 공부가 끝나면 죽곡 이장영 선생의 막내딸인 함평 이씨 소녀(훗날 애생이 엄마로 둘째부인)와 어울리며 소꿉친구로 함께 마을 뒷동산과 냇가에서 자주 어울려 놀았다.

이곳에서 개울가, 뒷동산은 강항에게는 자연스러운 놀이 공간으로 충분했고 마을 앞 냇가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거기에서 멱도 감고 송사리나 붕어, 매기 등의 물고기 잡는 재미에 행복한 유년(幼年)시절을 보냈다.

학당의 또래 친구들과 강항은 늘 이씨 소녀(애생이 엄마)를 챙겨주며 함께 놀았고 둘이서는 자연스럽게 또래 아이들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나면 자연히 한가로운 시간을 가까운 시냇가에서 보냈고 시냇물이 흐르는 넓은 평야지대를 벗삼고 구암마을의 들판과 뒷동산을 올라 자연스럽게 또래들과 함께 어울려 놀았다.

이처럼 개울가, 바닷가, 구암마을의 동산과 들판은 강항에게는 자연스러운 놀이동산이 되었고 어린시절 추억의 공간으로 여유로움을 채우는 것으로 충분했고 주변에 그럴싸한 놀이개가 없어도 구암마을 앞 개울가에는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기에 강항의 이곳에서의 생활은 더욱 갑갑함과 막힘이 없는 너른 터전이었다. 

마을 개울가에 깔린 다슬기도 줍고 싫증이 나면 잡다한 송사리, 피라미 물고기들을 잡기도 하고 때론 개구쟁이처럼 멱과 머리를 감으며 물장구도 치고 뒷동산에 올라 진달래도 먹으며 저녁 해가 지고 석양의 노을이 짙게 깔리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놀이에만 집중하기도 했다.

구암마을의 산과 들에는 풍요로움이 사시사철 항상 가득했다. 머루와 다래를 따먹기도 하고 진달래와 들꽃을 쳐다보면서도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에 한없이 마냥 신나게 유년기(幼年期)를 보내고 놀았을 것이다.

죽곡 선생의 가르침은 참으로 엄격했다. 글을 가르치면서 늘 선비정신과 애국충정을 같이 가르쳤다. 벼슬만을 탐하는 벼슬아치가 되면 결코 안 되며 임금과 백성을 위하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매사를 큰 바위신령님처럼 골똘히 생각하여 매사를 담담히 처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구암마을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반년이 지나게 되자 죽곡 선생은 강항에게 몇 일간 고향에 다녀오도록 하였다.

“항아 이제 고향에 부모님께 다녀 오거라. 학문도 중요하지만 간간이 몸이 무탈함을 알려 드리는 것도 효도의 근원이다.“ 


강항이 8세 때인 1574년 어느 날 이미 주변 마을에 신동으로 파다하게 알려진 이후 구암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칠암마을(고창군 공음면 칠암마을)에 들렀을 때 일이다.

그
 당시 마을 유림(儒林)들은 송나라 주자(朱子)가 어렵게 중국 역사서를 집필(執筆)했다고 소문난 중국고서(中國古書)『통감강목(通鑑綱目)』을 건네주며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강항은 중국고서(中國古書)『통감강목(通鑑綱目)』을 손에 넣자마자 막힘이 없이 줄줄 읽어가면서도『통감강목(通鑑綱目)』을 다 읽어 내려갈 때까지 한밤중까지 손에서 결코 책을 놓지 않았다.

강항은 하룻밤을 온통 하얗게 자새웠다. 강항은『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고 또 읽어서 그 다음 날 아침나절에 마을 어른들과 유림(儒林)들 앞에서 줄줄 외우게 되니 칠암마을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찬사(讚辭)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드디어 유학자 중 한 칠암마을의 원로가 나서서 “오늘 우리 칠암마을에서 천재 소년 신동(神童)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 마을의 경사입니다!! 그리하여 이 일곱 봉우리의 칠암마을을 앞으로는‘강목(綱目)촌’이라 명명(命名)했으면 하오!!” 라고 말하자 모두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찬성을 하며표했다.

강항의 천재성으로 마을의 고을명이‘강목(綱目)촌 
’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강항은 이 무렵 읽었던『통감강목(通鑑綱目)』은 선조 37년 1603년 (37세)에『강감회요綱鑑會要』17권 30책으로 미흡한 내용을 보강하고 요약해 다시 해설을 붙인『강감회요』로 집대성시켰다.

이러한『강감회요』는 당시 후학들의 텍스트북으로 재탄생되었다. 

이처럼 강항의 천재성은 감히 상상조차 못할 경지였던 것이다. 

천재 소년 강항은 9세에 그동안 쌓은 학문을 바탕으로 삼아 도학의 경지로 들어서고자 시문을 발표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도리를 설파했던 것이다.

어김없이 그 진가가『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에 담겨있다. 이는 어릴 적 착하고 선한 마음이 성인(成人)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갖춰져야 하며 창공에 띄어 논 연줄이 바람에도 끊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연결되어져 멋지게 연이 날려지듯 계속해 어린 마음이 이어져야 한다는 내용의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아마도 강항은 이 무렵까지 구암마을의 죽곡선생의 이씨 소녀와의 어린 시절의 소꿉 만남은 이토록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애틋했던 소꿉놀이 친구인 어린 소년과 소녀(이씨 부인)의 만남은 훗날을 약속하듯 이어 졌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인연(因緣)의 연속이던가?!

강항은 10세에는 또 멀리 충청도 지역을 찾아나서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예(禮)와 경학(經學)을 활용하고 터득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다양하게 학문을 탐닉한 강항은 엄격한 가풍(家風)과 선비로서의 갈 길이 정해져 있었고 선비의 훌륭한 가문에 항상 승승장구할 운명을 타고 났었다.

강항은 부모와 형제가 머물고 있는 영광 불갑 금계마을을 배경으로 학문을 넓혀가고 항상 도학의 경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강항은 고향 유봉에 돌아와 엄격한 부모님의 훈육과 가풍아래 학문에 전념하며 선비로서의 길을 닦아 나갔다. 불행은 날벼락처럼 다가온다.

 강항이 14세에 들어 모친인 김씨부인이 타계하게 된다. 강항은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피붙이 중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고 인생의 허무함을 처음 당하는 터라 더더욱 효심(孝心)이 남달랐다. 3년간 시묘(侍墓) 부모의 상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삶. 살이를 둘째 형 준과 셋째형 환과 함께 3년간 시묘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어린 나이에 벌써 지극한 부모에게 효사상의 선비로서 덕목을 실천하며 참다운 선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토록 그는 죽음을 넘어 유교의 효 사상에 입각하여 효심(孝心)과 애틋한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이를 증명하듯 1597년 왜수군에 피로되면서 어머니의 위패를 바다에 떠밀려 보내는 상황이『간양록』섭란사적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승승장구하는 강항

강항은 이윽고 16세에 향시(鄕試) 지방(地方)에서 실시(實施)하던 과거(科擧)의 초시(初試).에 합격하는 영광(榮光)을 얻게 된다. 

이후 강항은 유아기때부터 학문에 정진한 보람으로 드디어 1588년 진사가 되었다. 이렇듯 강항이 진사의 벼슬에 오르자 주변에서 혼인을 맺고자 사주단자가 끊임없이 오고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참봉 김봉의 딸인 진주 김씨(晋州 金氏)와 결혼을 했다. 조선의 혼인 제도는 17세기까지 남자가 여자 집에 의탁하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이었다. 이 풍습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혼인 풍습으로 성리학을 표방했던 조선시대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강항의 경우는 남달랐다. 부모와 형제가 머물고 있는 영광 금계마을에서 신혼생활을 이어갔다. 

강항이 1591년 25세에 집안에 연이어 불행이 찾아 들어왔다. 3세에 사서오경을 가르친 백형 저어당(齟齬堂) 강해(姜瀣)의 죽음을 목격하고 만다.

강항에 못지않은 유학자이기도 한 강해(姜瀣)를 무능한 군주 선조는 강해(姜瀣)를 매번 칭찬했다. 왕실에서 경연이 펼쳐질 때마다 선조는 만조백관 앞에서‘호남의 문장가는 강해(姜瀣)’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문장가인 강해(姜瀣)를 절대군주인 선조는 정여립사건에 연루시켜 신묘사화 연류자로 몰아 저어당(齟齬堂) 강해(姜瀣)를 가차없이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강항은 이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애상(哀傷)해 하였으며 이후 겉으로 그러한 어두운 자취를 감추면서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며 상통흠적(像痛欽迹)했다.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라는 인물이 등장해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했다.(1591년)

통일을 달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의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무사들을 모아 대륙출병의 야욕을 불태웠다.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로 치안이 불안했던 왜국의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을 억제시키면서 조선까지도 지배하겠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은 고니시가 인솔한 1번 대는 병선 700여 척으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곧바로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했다. 가토가 인솔한 일본군 2번 대는 4월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경상 좌도를 택하여 울산을 함락하고 충주로 향하였다.


일본군은 9번 대 까지 총병력 10만을 연달아 투입하여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다행히 전라도는 진격로에서 벗어나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전 국토는 전쟁 상황에 들어갔고 정규 병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어디에서 사태가 일어나면 그곳이 중심이 되어 군병을 모으는 모병제였기 때문에 군병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조선 중기 선조는 즉위(1567년) 이후 인재등용에 실패하고 동서, 남북 등 사색당파싸움에 붕당(朋黨)정치로 서로가 으르렁거리며 이전투구식 싸움으로 인해 국제정세를 오판하여 참혹한 왜침의 임진년 동아시아 국제전쟁인 전쟁을 막지 못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1592년(선조26년) 졸지에 나라가 짓밟혀 왕과 조정이 의주 까지 쫒겨가고 조정은 명나라를 끌어들임으로 1년 4개월 만에 가까스로 선조는 다시 한양에 입성하게 되었지만 조선 팔도는 일본군에 순식간에 짓밟히고 조선은 그야말로 아무런 힘도 없는 허수아비만이 사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히 지방마다 향토를 지키고 이끌던 유생과 선비 승려 등이 변변한 병기도 없이 오직 의기(義氣)만으로 스스로 의병이 되어 일어났다.

영광에서도 유림 유생들과 함께 강항은 의곡 군기등을 모아 제봉 고경명 의병소에 보내는 등 기울어 가는 나라의 등잔불같은 운명을 붙잡기 위해 힘을 바쳤다.

그나마, 광해군은 1593년 4월 왜병이 서울을 철수한 뒤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지역까지 다니며 군민을 격려하며 민심을 수습하려 힘썼다.

전시상황 속에서도 조정(朝廷)은 전주에 분조를 두고 인재(문관, 무관)를 보충할 수 있도록 전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러 인재를 등용토록 했다.

강항은 김씨부인과 안정된 가정에서 1593년 27세(1593)에 무과와 문과에 동시에 급제하게 된다. 이때 강항은 전주에 올라가 하룻밤을 객주(客主)집에 묵게 된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기구한 운명의 만남이던가? 강항은 뜻하지 않게 소꿉동무인 이씨 소녀를 운명처럼 이곳 객주(客主)집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씨 소녀 죽곡선생의 막내 딸는 과년(瓜年)해 구암마을인 고향을 떠나와 이곳에 이미 수년 전에 올라와 먼 친척인 객주(客主)를 도와주며 장사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누구야!! 항?!”

하지만 이미 결혼한 강항의 결심은 단호했다. 어릴적 그토록 다정했던 이씨 소녀를 짐짓 모르는 척 냉정하게 대했다.

“누구시오!, 일 없소!!”

강항은 오로지 과거시험에만 전념하여 별시문과 병과에 합격하고 객주 집에 있는 이씨 소녀 몰래 곧바로 고향인 영광으로 내려왔다. 강항이 그토록 차갑고 냉정하게 대했으나 이씨 소녀는 그런 강항이 언제 어떻게 내려갔는지 그 영문도 모른 채 며칠 동안을 뜬 눈으로 날밤을 지새우고도서 당시 이씨 소녀의 생각은 단호했다.

“그렇다면 내가 영광으로 내려가야겠지!!”

어릴 적 온종일 함께 거침없이 온 동네를 뛰어놀았던 오매불망(寤寐不忘) 꿈속에서 그리던 정인(情人)이었던 강항! 이미 그 시절 순수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렸던 강항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이씨 소녀는 어릴 적 지난날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가 그날이후 밤낮으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이씨 소녀는 그동안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마음으로 강항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인 채 지금까지 살아오다가 이처럼 낯선 타관 땅에서 다시 재회(再會)했던 것이 운명처럼 생각했다.

“이게 필시 내 운명(運命)일게야!!”

이씨 소녀는 오로지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回想)하면서 강항만을 생각하며 일주일 밤낮을 쉬지 않고 걸어서 그의 고향을 물어물어 영광군 불갑면 금계마을을 찾아 내려갔다.

전주에서 그 먼길을 걸어 힘들게 금계마을에 도착한 이씨 소녀는 마을 어귀에서 수일 동안 음식이라곤 단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고 강항에게만 품은 애틋한 감정을 온몸으로 표출(表出)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수군대며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인데? 저 처자는 누구 집 여식이래?”

“시방 말도 하지 말어!! 저쪽 유봉 어른댁의 강항이라는 선비 있잖어?? 거기 여자인데 상사병이 나 굶어 죽겠다는 각오로 저렇게 버티는거래!!”

“오메 저러다가 정말로 굶어 죽겠구먼!!”

마을 사람들 입방아에 급기야 문중 어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한 처자(處子)를 우리 마을에서 굶주림에 횡사(橫死)시킬 수 없지 않겠는가?”

“필시 저러다간 큰 일이 나고 말겠는데??” 

마침내 집안 어른들이 문중회의(門中會議)를 열어‘사대부(士大夫) 가문에서는 처첩(妻妾)을 두는 것은 큰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 이씨 부인의 지극한 마음을 문중 어른들의 결정에 힘입어 강항은 두 번째 부인으로 이씨 소녀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김씨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보지 못한 강항은 이씨 부인을 맞이하고서 급기야 1594년에 처음으로 딸 애생(愛生)이가 태어나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강항은“내 인생에서는 자식이 없나보구나!”했는데 28세에 애생이가 태어나자 그 기쁨이 아주 컸다. 그런데 강항은 30세가 다 되어가는 1596년에  늦둥이라 할 수 있는 아들 용이가 태어났으니 그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 생생한 기록을『간양록』섭란사적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만년에 아이를 가졌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용이라고 지었다. 그 아이를 갖기 전에 꿈속에 바다에서 해룡 한 마리가 힘차게 떠오르는 꿈을 꾸고 나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렇듯 강항은 두 부인인 김씨부인과 이씨부인을 맞이해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매년 해를 더해 갈수록 강항은 그 진가가 어김없이 뛰어난 실력으로 발휘되어 갔다.

그 이듬해 봄에는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子)가 되었다. 이렇듯 승승장구하여 강항은 29세(1595)에 박사에 올랐고, 30세(1596) 봄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596년 그 해 가을에는 공조좌랑으로 발탁되었다가 급기야 한 계절만인 겨울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 정유년 초, 형조좌랑 강항은 그해 봄에 조정으로부터 휴가를 얻어 고향 유봉마을에 와 모처럼 한가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의병장 강항

그러던 그해 1597년 8월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강항은 분호조(分戶曹) 중대(重大)한 일이 생겼을 때, 호조(戶曹)의 일을 나누어 맡아보던 임시(臨時) 관청(官廳)

 참판이 되어 전라도 군량미 수송책임을 지게 되었다.  갈수록 전세(戰勢)가 기울어져 7월에 한산 섬의 관문이 무너지고 8월에 호남의 중심인 남원이 힘없이 함락 당하자 남원성을 수성했던 관리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뒤늦게 군량미와 병기를 갖고 남원성에 도착한 강항은 폐허로 변한 남원성을 뒤로 하고 어쩔 수 없이 고향인 영광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영광에 돌아온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고향 영광향교에서 수성을 결의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계속해 전세가 불리해지고 영광 땅은 온통 불바다로 변하고 있었다. 영광을 수성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져 불가피하게 식솔들과 피난길에 오르게 되어 서해바다에 배 2척으로 나아가 이틀밤을 바다에서 지샜다. 때마침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있던 사촌형인 종과 협을 만나 강항은 식솔들과 회의를 거듭했다.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가 의롭게 죽자!!”

“아니오!! 그건 옳지 않소. 다시 육지로 가 살길을 알아봅시다!!”

결국 강항의 주장한 의견에 힘입어 모두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 장군의 지휘 아래. 또는 그 지휘 아래에 딸린 군사.로 들어가기 위해 배편으로 남행(南行)을 결심했다. 그러나 뱃사공인 종놈 만득이 자기 처자식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한밤중에 노를 엉뚱하게 저어 서포인 논잠포에 당도하고 말았다.

결국 염산 논잠포 앞바다에서 도도다카도라의 부하 왜수군의 수장인 신칠량에 의해 피로(被擄)되고 말았던 것이다. 


왜(倭)로 피로(被擄)되다!!

 이와 같이 강항의 식솔들은 포로로 붙잡혀 결국은 왜 수군에 의해 각 각의 왜선으로 분리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말았다. 둘째 형 회은공 준과 셋째 형 퇴은공 환의 가족과 그리고 김씨 부인과 애생이, 용이는 같은 배에 있었지만 부친 몽오공 극검은 다른 배로 분리되었다. 이 무렵 둘째부인인 이씨 부인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 난리 통에 강항은 아들 용(龍)과 딸 애생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당시 31세에 영광 논잠포 앞바다에서 아들 용(龍)과 딸 애생이를 잃고 통한(痛恨) 속에서 쓴 시(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처절하고도 비통한 심정이 이런 것이다. 강항의 절제(節制)된 아픔과 슬픔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듯 배어나고 있음이다.


“兒兮莫望父 아이야! 아비를 잊지 말라!! 

致汝無辜惟我罪 무고한 너를 죽게 만든 것이 오직 나의 죄라!! 

百年慙痛淚闌于 평생(백년), 부끄럽고 원통해서 통한의 눈물만 흐른다.”


강항과 이씨 부인과는 참으로 모진 인연의 연속이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에도 피로되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서해바다로 피란길에서 강항과 이씨 부인은 이미 논잠포 앞바다에서 왜수군에 의해 생이별(生離別)을 했기에 서로가 지금까지 생사(生死)조차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둘째부인이라는 구실로 왜수군들은 이씨 부인을 다른 첩실과 함께 강항으로부터 홀로 떨어져 건너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강항의 식솔들은 왜놈들이 일으킨 전란 통에 급기야 포로로 바다 한 부분인 이름 모를 왜선(倭船) 이곳저곳에 끌려와 망망대해에서 일주일여가 지나가고 있었다.


애생이 엄마 이씨부인 죽음

순천 앞바다 왜선(倭船)에서 외로이 식솔(食率)들과 신세 한탄(恨歎)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이씨 부인의 외침을 저 건너편 배편에서 처음 듣게 된 것이다. 

“영광사람 어디 없소?!”   “영광사람 어디에 없소?!”

이날 이씨 부인의 흐느낌과 외침은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하는 절규의 외침이었다. 냉기로 가득한 남해바다를 온통 한으로 적시며 그 통곡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며 애처롭고 처절하고도 가냘프게 바람에 묻어 들려오고 있었다.

또 다시 애절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영광사람 어디 없소?!”

이 절규(絶叫) 속에 품은 속마음은 얼마나 님을 그리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고 영광사람을 찾아 그와 아들과 딸 애생이와 용이의 생사 소식을 듣고 싶어 그랬을 것이라 싶다.

“여보시오!! 영광사람 어디 없소!!!” 

건너편 배에서 들려오는 짧은 외마디 소리에 건너편 배에서 그와 함께 있던 둘째 형수가 깜짝 놀라며 강항(姜沆)에게 다급하게 다가와 귓속말로 전했다. 

“서방님! 저기 저 사람!! 애생이 엄마가 분명하오!!!”

 연신 건너편 배에서 쓰러질 듯 들려오면서도 애절하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이씨 부인의 애절하고 구슬픈 목소리는 애간장을 끓이는 소리였다.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말마적인 외침으로 넓고도 넓은 공허한 바다에서 메아리로 남아 계속해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포로이면서도 무지막지한 왜선에서 그렇게 야무지게 대항했던 이씨 부인은 애석하게도 다음날까지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왜놈들에게 당당하게 아우성으로 맞서다가 결국은 왜놈들의 뭇매를 견디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만다.

강항과 이씨 부인(李氏 夫人)의 만남은 인생에서 우연(偶然)과 필연(必然)을 연상시키며 그 당시 이씨부인(李氏夫人)의 절개와 지조는 현재까지도 정여문을 세워 높이 칭송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실로 귀감(龜鑑)이 되고 지아비를 섬기는 여인의 행동으로 우러러 보게 될 것이다. 

당시 강항은 이를 칠언시(七言詩)로 부부의 서러운 이별과 처절한 슬픔을 피눈물로 섞어 노래했다.  


 *상사한(相思恨)

   滄海茫茫月欲沈   푸른 바다 아득히 멀리서 달마져 지려는데,

   淚和涼露濕罹襟   이내 눈물이 차디찬 이슬로 변하여 내 옷깃 적시네.

   盈盈一水相思恨   그렁그렁한 눈물이 한줄기 흐르는 건 님을 그리워하는 한(恨)이니,

   牛女應知此夜心   우리 둘, 오늘 밤 이 아픈 마음만은 그대는 알리라.


이 상사한의 시를 노래로 만들기도 했는데 아래와 같다.


상사한(想思恨)노래

 https://app.suno.ai/song/2eede0ee-8cb1-4f8a-8027-c1d3a06fde72   강  항 원작 / 강대의 편작


[Verse 1]

   아득한 바다에 달빛 어린 밤이어라

   눈물섞인 찬 이슬 망울에 옷깃이 다 젖네

   넘치는 물결은 임 그린 눈물이던가

   견우야 견우야 너만은 알리라.

[Verse 2]

   이 밤의 사무친 한을 알리라.

   눈물결에 영혼이 녹아내려.

   그리움이 넘치는 가슴에 흘러.

   견우야 견우야 너만은 알리라. 알리라.

[Chorus]

    잠 못 드는 밤에 아픈 가슴에

    바다의 눈물이 흐르고 있어.

    흐르는 눈물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 사랑이 이렇게 멀리라.

[Verse 1]

   깨어난 바다에 푸르름이 넘치거라

   님의 고뇌와 상사화 품은 회한이 밀려오네

   오백년 세월은 임 향한 절의이던가

   견우야 견우야 너만은 알리라.

[Verse 2]

   이 밤의 사무친 한을 알리라.

   애생이의 사랑이 녹아내려.

   이씨부인의 외침이 절규임을.

   견우야 견우야 너만은 알리라. 알리라.

[Chorus]

   잠 못 드는 밤에 아픈 가슴에

   바다의 눈물이 흐르고 있어.

   흐르는 눈물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 사랑이 이렇하듯 알리라.

 


이러한 아픔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은 애국애족((愛國愛族)하는 사상과 선비정신은 그 어떠한 역경(逆境) 속에서도 이후에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에히메현 히치가와 해변에 도착한 강항일행은 10여일을 굶주림으로 입항해 기진맥진하여 해변물결에 휩쓸려 죽을 뻔했다. 그러나 인근 농사를 짓는 왜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구출했으며 이어 강냉이죽을 가져와 그것으로 인해 겨우 생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왜인 농부들의 모습에서 강항은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도 사람사는 마을로 인정이 있구나. 철천지 원수와 같은 나라이며 개, 돼지보다도 못한 놈들이 즐길 그런 풍광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사는 이 사람들이 몹시도 안타깝구나.”

이처럼 강항이 처음 도착해 생기를 찾은 곳 오모이 야리(지성)에는 강항 지장상과 강항 지성비, 강항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처럼 강항은 처자식을 잃고 도착해 지금까지 왜의 땅에서 조석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웃음조차 감추고 힘든 나날을 개망나니 같은 놈들의 소굴에서 정신을 놓지 않고 생활을 이어갔다.

오즈성에서 만 1년여만에 다시 오사카성으로 이송해 갔다가 이어 교토로 압송되었다. 강항이 일본 교토 후미성에서 모진 포로생활을 하면서 여섯 살이나 더 위인 왜승(倭僧) 순수좌를 처음 만난다.

이미 오즈성에서 호인(好人)을 비롯한 많은 지식층에서 강항의 높은 학식에 매료되어 그 소문이 교토에도 전해왔다. 순수좌는 강항과 필담을 주고 받다가 얼마되지 않아 높은 학식에 깜짝놀라고 만다. 대단한 식견에 무릎을 꿇고 제자(弟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강항은 정유년 전쟁으로 처자식을 잃고 개나 돼지보다 못한 왜장수들에게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말하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노라고 항변한다.

이에 순수좌도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비롯한 군부가 썩을 대로 썩었으며 도탄에 빠진 일본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서라도 신학문인 신유학을 전수받아야 하노라고 간절하게 또 다시 간청해 왔다.

강항도 순수좌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군부를 강력히 비난함에 감흥되어 일본인 민초들을 위한 교육의 당위성에 동조하기에 이른다. 

강항이 후시미성에 도착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본 순수좌는 한편으로는 매일 조석으로 심의(深衣)를 벗지 않고 조선선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생활한 강항을 존경해 왔다. 강항은 이처럼 적국에서도 항상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에 순수좌는 유교의 복심이랄 수 있는 심의(深衣)에 동경하게 된다. 강항이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면서 선비로서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고 의관을 정제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한사코 심의의 제작과정에 매달리게 된다.

거듭 순수좌의 열정에 감동을 받은 강항은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의관의 정제 기술까지 전해주게 된다.

더 나아가 순수좌는 강항과 나눈 이야기 중에 왜군의 장수인 적송광통을 말하며 신유학에 매료된 장수이며 보기드문 순수좌의 후원자임을 강조해 말했다.

이후 적송광통은 강항의 제자로도 손색없이 1600년 5월 19일 강항이 귀국할 때까지 든든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후원자이며 일본의 장수로 등장하게 된다. 



일본유교의 비조가 되다

‘철천지원수와 같은 나라이며 개, 돼지보다도 못한 놈들’이라고 이를 갈았던 강항에게 순수좌는 여느 왜인하고는 달랐다. 순수좌 역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폭정에 이미 질려 있었고 중국이나 조선이 왜국을 침략해 순수한 왜민족을 보호해줬으면 한다는 대화를 나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강항은 순수좌와 속마음을 툭 터놓고 대화를 끊임없이 갖게 되고 순수좌의 마음을 안 강항은『성재기』와 『시상와기』를 직접 적어『성』과『와』를 아호로 내려준다.

그리하여 순수좌는 후지와라세이카라(등원성와)는 유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이처럼 필담(筆談)을 통해 『강항휘초』를 일본인들을 위한 교육총서로 전파하였으며 사서오경 등 16종 21책을 발문해 일본유교(日本儒敎)의 비조(鼻祖) 어떤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

가 되었다. 

이미 강항은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을 넘어 조선의 유교경전과 주자학(朱子學) 사상으로 도학(道學)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유학자로서 손색이 없는 최고의 지성의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 17세기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절단에게 해동 강부자로 강항을 높이 평가했다.


당시 왜국에서는 전쟁을 싫어하는 1% 식자층 부류의 승려계급인 후지와라 세이카(등원성와)는 왜승(倭僧)으로 신유학 사상에 잔뜩 목말라 있었으며 최고봉에 오른 강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경제부국을 말하는 현대 일본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역사에서는 가정법이 없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강항의 적중 봉소에 의하면 이 당시 왜놈들의 99%가 무지랭이 민족이 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을 중심으로 일본의 역사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끝나고 에도(江戶) 시대가 시작될 때를 기준으로 중세(中世)와 근세(近世)로 나뉜다. 같은 봉건시대면서 왜 시대를 나누는 것일까?

그것은 생활문화의 변화에 기인한다. 그때까지는 종교불교의 영향이 컸으므로 학문은 승려를 제외하면 일부 학자 또는 특권 계급만이 누릴 수 있었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유학의 전파로 인한 영향으로 종교를 배제한 합리적인 교육이 일반 대중 사이에 확산되어 
데라고야(寺小屋)사숙(私塾) 오늘날의 학원과 같은 곳과 에도 시대에 널리 퍼진 서당와 같은 서당에서 요원의 불길과 같이 전국적으로 뻗어 나갔다. <이하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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