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년01월03일 16시04분 ]이어가다!!
수정작업에서 삭제되어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다.
그 곳에서 사용한 교본의 대부분은 소학부터 시작해『강항휘초』의사서오경(四書五經)등이 있었다.
공자, 맹자 曰….
크게 소리를 내어 읽으며 무릇 교육과는 인연이 없던 일반 서민들이 처음으로 글자를 알고 학문에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 척박한 사무라이시대에서 기초가 다져진 신유학은 곧바로 이어지는 명치유신을 몰고 오는 근세 문화의 개막에는 많은 조선인들의 목숨을 건 활동이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강항(姜沆)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피로(被擄)되어 간난신고를 거치며 너무나도 비참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그가『강항휘초』를 통해 발문한 사서오경의 일역(日譯)에 힘써 일본인의 신교육과 문화 부흥에 헌신한 공적을 하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일본에 수은 강항선생연구회 무라까미 쓰네오 회장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풍신수길의 죽음
한 번은 강항이 오즈에서 탈출을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의 무자비한 침략을 엄히 꾸짖는 문장(文章)으로 석가모니가 천벌을 내려 마침내는 혹독한 대가를 치룰거라는 엄청난 벽서(壁書)사건을 벌인다.
그런데 별안간 그 다음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가 횡사(橫死)를 하자 강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내 자기가 뜻한바 대로 이루어졌다고 기뻐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그를 북문 밖에 묻고 그 위에 황금으로 장식한 전각 나무·돌·금옥 등에 전자로 인장을 제작하는 예술을 짓고 남화라는 승려는 비문에 이렇게 썼다.
“대명 일본에는
온 세상 떨친 호걸이 났도다.
태평한 길을 열었으니
그의 덕 바다같이 넓고 산같이 높아라.“
이 글을 본 강항은 격분(激憤)하여 붓으로 죽죽 문질러 버리고 조선국 침탈(侵奪)에 대한 비난의 글을 주저하지 않고 막힘없이 써 내려간 장문의 글은 수은 강항의 대범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逸話)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 평생 경영한 게 한 줌 흙 된다는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았구나!!
탕알 만한 네 땅 지금 타인 손에 들어 갔느니라
(탕알 만한 하찮은 놈) 무슨 일로 청구(靑丘=조선) 땅에 당돌하게 대들었나!!!“
[Verse]
허무한 낙원
1. 한 평생 가꾼 포부가 고작 한 줌 흙밖에 안 되었다는 말이던가
이제와 십 층이나 되는 황금 전당이 부질없이 높기만 하였구나
[Verse 2]
탄알 만한 너의 땅이 지금은 다른 사람 손에 들어 가고 말았노라
원숭이 형상에 하찮은 놈이 어찌 조선에 당돌하게 대들었던거냐
[Chorus]
허무한 낙원, 꿈꾸던 세상은
없어져 버렸지만 야만스뤘던 너 졸개 허무한 낙원, 상처만 남아
가당치도 않던 꿈은 물거품 인거야
[Verse]
2. 한 일생 동안 교활한 모습 한 켠 그림자 로 비췄다는 말이던가
어찌해 능구렁이 처럼 매양 전쟁만 휘감고 휘감아서 다녔더냐
[Verse 2]
탄알 만한 너의 땅이 지금은 위정 자의 손에 놀아 나고 놀아나노라
결국은 네놈의 하찮은 짓이 일본 백성의 원성으로 되돌고 있노라
[Chorus]
허무한 낙원, 꿈꾸던 세상은
없어져 버렸지만 야만스뤘던 너, 졸개 허무한 낙원, 상처만 남아
가당치도 않던 꿈은 물거품 인거야
적의 땅 일본에서 그것도 포로의 몸으로 일본의 최고의 통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를 욕되게 꾸짖다니, 보통의 담력(膽力) 가지고 또는 범인(凡人)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사건이었다.
강항(姜沆)은 비록 왜국 한 곳에 갇힌 몸이지만 당당하게 기개(氣槪)를 펼쳐 당시 식자(識者)층인 일본인들의 간담(肝膽)까지 서늘하게 했다.
그의 저서「간양록(看羊錄, 정조 22년 1798년 무오년 『看羊錄』중 <산성이설지사>로 試題 삼음)」에서 그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선비정신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익히 삼국시대의 백제인으로 추정되는 왕인이「천자문」과「논어」로 일본유학의 씨를 뿌리고 아스카(飛鳥)문화를 꽃피우게 했다면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일본 강호 막부 12세기에서 19세기까지 쇼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무사 정권을 지칭하는 말 문화에 신유학을 뿌리내려준 인물로 일본 유교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으며 오즈시에서는‘홍유 강항선생 현창비’를 세워 매년 추모하고 있으며 오즈시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그를 중요한 인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신유학의 비조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족적을 남기고 일본에서 유명한 일본인 당시 유학자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모든 일본 유교 책자에는 조선에서 정치의 근본이 된 신유학을 비롯해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모든 유학 서적들은 강항(姜沆)선생에 의해 선생이 발문(跋文)하여 선생의 머릿속의 학문만을 베껴 쓰고 그가 갖고 있는 지식이 일본의 서책(書冊)들로 만들어 졌기에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의 텍스트임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충분히 영악한 근대와 현대의 일본학자들은 이후 앞 다퉈 중국 현지의 원서(原書)와 검증해본 결과 강항이 발문한 서책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문서임을 입증하고 나서야 그의 위대함을 재삼(再三) 인정해 오-즈시에 성역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유재란의 폐해(弊害)로 빚어진 왜놈들의 포로생활 중의 강항의 가르침이 곧 지금의 일본의 근대사의 지표(指標)가 되었고 일본의 진정한 근대사 유교가 되었다.
또, 어제와 오늘의 일본에 명확하게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놀랍게도 이를 발전시켜 명치유신(明治維新)과 화(化)사상으로 변화를 꾀하여 이와 같은 학문의 원동력으로 일본경제가 바로서고 사회질서가 잡혀 지금의 일본이 반듯하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강항은 당시 일본 고승들에게 경전(經典)을 써주기도 하고 성리학(性理學) 정주학 중국 송나라 때의 정호(程顥)·정이(程頤) 및 주희(朱熹) 계통의 유학. 성리학(性理學). 송학(宋學)
을 가르쳐주는 등 조선유교의 진수를 일본에 전파함으로서 식자층의 일본인들이 지금도‘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라고 부르며 그를 공경(恭敬)하고 있다.
강항(姜沆)은 이토록 포로생활 속에서도 일본 유일의 지식층인 순수 좌 후지와라 세이카와 성주 아카마쯔 히로미치(赤松廣通)에게 유교를 전파해 근대일본이 제대로 정립되도록 했다.
그리하여 얻어진 지리와 군사시설 등 적국의 실정(적중봉소)을 죽음을 무릅쓰고 권율장군의 노비인 김석복 편에 보낸 것이 그 하나요, 다음은 교토에 와서 중국의 사신(使臣) 왕건공(王建功) 편에 보낸 것이 그 둘이며, 신정남 편에 보내진 것이 셋으로 고국에 은밀하게 왜장들의 인물됨과 그 수를 헤아리게 하는‘임진정유입구제왜장수(壬辰丁酉入寇諸倭將數)’를 기록하여 임금에게 다다르게 하였던 것이다. 이 적중봉소를 받은 선조는 당시 크게 감탄하고 나라의 수비를 맡고 있는 각 진의 장군들에게 돌려보도록 조치하였다.
포로 38명과 귀국길
당시 포로생활 중의 강항(姜沆)은 수제자(首弟子)인 후지와라 세이카의 충언(忠言)으로 조선 땅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일념(一念)에 왜놈들에게 글을 써주기도 하고 그들이 원하는 시를 지어주면서 고국에 돌아갈 금전(金錢)을 모으기 위해 틈틈이 은화(銀貨)를 모아 갔다.
그는 매일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강항과 그의 식솔들이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는 도중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준비해준 배를 갈아타고 선조 33년(1600) 3년간 포로생활에서 34세에 가족들과 함께 38명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건 당시 조선인 포로 중에는 이미 각 지역에 명문귀족 집안의 여성에게는 열녀각 정문(旌門)을 조정으로부터 받게 되고 남성에게는 충신(忠臣)으로 정절비를 받은 자가 왜국에서 풀려난 포로에 포함되어 있어서 조선의 각 문중에서는 대혼란이 발생되고 말았다.
이처럼 강항은 이들을 적지(敵地)에서 데리고 올 때 계획은 큰 배를 구하고 50여일을 바다에서 하루하루를 생활해야하는 음식과 식량을 조달해 어렵고도 힘들게 구해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과 문중의 묘한 관계로‘그곳에서 생사만 확인해주면 됐지! 왜 조선국으로 데리고 들어왔느냐’며 힐책을 받기도 했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문중의 귀함만을 강조하는 어처구니없는 당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는듯하다.
후학의 요람 운제마을과 이조이부인
강항이 귀국 후 선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종용했으나 백형 저어당 해의 신묘사화의 폐해를 직접 눈으로 봐온지라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더욱이나 선조는 당파에 치우쳐 강항을 영광 땅에 후학양성이라는 명분 아래 스스로 갇히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 마음까지 가둔다.
그러면서 강항은 오로지 후진양성과 문적에 대한 집필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금계마을을 벗어나 운제마을 삵고개 근처로 운제학당을 세우고 옮겨 60여명의 명문자제와 문중의 학자를 길러낸다.
강항의 사촌형제들은 고려말시대의 高麗三隱 [고려삼은]인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 고려(高麗) 말기(末期) 성리(性理) 학자(學者)이며 충절(忠節)이 높았던,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 세 사람을, 호의 같은 글자 '은'을 따서 일컫는 말. 야은 대신(代身) 도은 이승인을 넣기도 함의 신유학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해 20여명의 사촌들도 함께 아호를 은(隱)자를 고집해 사용했다.
정유재란의 폐해로 왜놈들에게 자식을 모두 잃은 강항(姜沆)은 이처럼 고향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정진하고 있을 무렵 죽창(익산공) 정홍명과 교유가 눈부시다. 정홍명은 서울 출신으로 1600년초에 영광 백수로 이거해 오게 된다.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던 정홍명으로서는 일본에서 귀국해 온 조선의 관료이자 선비인 강항의 소식을 듣고 자주 운제마을을 찾게 되었다. 익산군수를 한 정홍명에게 강항은 그를 익산공으로 호칭해 최근까지 관직에 있었던 정홍명을 배려했다. 두 사람은 서포에서 만나 뱃놀이를 자주하면서 흉금을 터 놓을 정도로 더 가까워졌는데 한 사람이 시를 지으면서 곧 이어 차운을 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더 유명한 일화는 강항이 거주하는 불갑의 운제마을에 와 운제(雲提)라는 마을 이름을 정홍명이 지어줬고 정홍명이 사는 백수를 찾은 강항은 지산(芝山)마을이라는 이름을 서로가 지어주기도 했다.
이뿐아니라 후에 정홍명은 강항의 부친이 돌아가시자(만력 을묘, 1615), 정홍명이 몽오공의 조사(弔詞)를 지었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처럼 두 사람은 자주 교유를 하면서 정홍명은 자식이 없는 강항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자기가 데리고 있던 첩실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강항은 함께 2년 8개월 동안 피로되어 고생한 첫째부인인 김씨부인을 끔찍하게 생각해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다.
그러한 내용이 서포에서 뱃놀이하고 돌아오면서 지은 시(詩)가 그의 문집인 수은집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강항은 정홍연의 끈질긴 권유에 못이겨 셋째부인을 맞이하게 되는데 내산서원 입구쪽에 건립된 정렬문의 주인공인 이조이 부인이 바로 그녀이다. 강항은 실로 이조이 부인을 맞이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1603년 아들 시만이 태어났으며 금슬이 좋아 또 다시 사내아이를 슬하(膝下)에 더 얻게 되는데 그 둘째가 시혜이다. 당시 첩첩 시집살이 중에서도 이조이 부인에게는 오로지 이 두 아들과 강항밖에 없었다.
당시에 장년의 나이가 된 강항은 35세(1602~)로 셋째부인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후실(後室)로 들어온 1020세대의 이조이 부인은 오로지 주야장창 강항(姜沆)만 보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조이 부인으로서는 당시 대가족사회에서 주변이 모두 어른들 뿐이었고 첫째부인인 김씨부인으로부터 조여오는 압박감은 이루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이다.”라고 2019년 세미나에서 전 광주일보 김 모회장은 밝혔다. 이렇듯 당시 이조이 부인에게는 희망과 즐거움이라고는 강항으로부터 받는 사랑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1619년 봄 5월 6일 강항은 끝내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만다. 이조이 부인에게는 희망이 절벽으로 찾아왔을 게다. 이조이 부인에게 정렬문을 내린 인조 임금은 “이조이가 상복을 입던 날 두 살배기 젖먹이를 내버려둔 채, 상복에 달린 배띠로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글로 남긴다.
두 이씨부인 중 애생이 엄마라 호칭되는 둘째부인은 왜 수군에 두들겨맞고 굶어죽음에 이르렀으며 이조이 부인이라는 실명이 나온 셋째부인은 남편을 따라 자결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昨今)의 역사적 문헌과 족보에는 셋째부인인 이조이 부인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기록과 설명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엄연히 이조이 부인의 소생(所生)으로 두 명의 남자아이가 태어나 현재까지 대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도 애생이 엄마라는 함평 이씨 부인은 의절묘를 안고 역사 속에 정실(正室)부인으로 인정받아 존재하는데도 정렬문을 받은 이조이 부인에 대한 자료는 네 줄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조이 : 형조좌랑 강항의 첩(정부인)이다. 남편이 죽자 음식을 딱 끊어버렸다. 상복을 입던 날 두 살배기 젖먹이를 내버려둔 채, 상복에 달린 배띠로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 때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영광군지(2013. 2. 15) 5권 83쪽)
여기서 우리는 유교의 창시자인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돌아보고 반면교사로 살펴봐야 한다. 공자의 출생은 공자의 아버지가 60세가 넘어서 난 첩의 소생이다. 공자의 처음 직업도 변변치 않은 장사나 장례를 치러주며 밥벌이를 하고 살았고 동네 무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학문의 깊이와 제자들로 인해 공자는 성인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지금 중국의 곡부 땅에는 공자의 3대 공부, 공묘, 공림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공자의 77대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세계 공씨 성을 가진 자만이 묻힐 수 있는 성지(聖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구국(救國)의 심정으로 애국애족(愛國愛族)하고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강항(姜沆)을 우리는 이제는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시대에 잘못된 역사를 현시대에 맞게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본처인 김씨 부인으로부터 자식이 태어나 소생(甦生)되어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소설(픽션)처럼 말한다면 그것이 더 선비정신으로 지성의 반열에 오른 수은 강항(姜沆)선생과 정부인(貞夫人) 김씨 부인으로서는 더 부끄러운 사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더 고민해 보고 각성(覺醒)해 보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필자는 수은 강항(睡隱 姜沆)선생께서 가장 힘들고 험난한 전란(戰亂) 속에서도 꿋꿋한 선비정신의 충절과 효심을 보여준 선비로서 그 험난한 시대를 모범적이고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지향(志向)하셨기에 감히 용기를 냈다.
역사는 사실적으로 기록되어야 하기에 ‘두 명의 이씨 부인이야기’가 소설화(小說化)작업으로나마 삼가 이조이 부인을 흠모하면서 기록했음을 일가친척(一家親戚)을 비롯해 독자분들께 자랑스럽게 선보이게 된 것이다.
묻어둘 때 묻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깝게 가고자 하는 노력은 후대에서 마땅히 감행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감임을 밝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설화한 점을 양해해 주기를 거듭 바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