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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칼럼>강항(姜沆), 일본을 가르치다

이순신은 칼로 나라를, 강항은 붓으로 나라를 지켰으며 강항은 여기에 하나를 더해 일본인을 가르쳤던 것
등록날짜 [ 2021년04월03일 19시09분 ]

1567년 전남 영광 한 마을에 신동으로 불리는 천재소년 강항이 태어났다. 3세에 사서와 오경(四書五經)을 맏형인 백형 저어당(齟齬堂) 강해(姜瀣)로부터 배우기 시작해 모르는 글이 없을 정도였다.


불과(不過) 그로부터 2년후인 5세 때 일이다. 전라감사 신응시(辛應時 1532~1585 백인걸의 문인)가 신동으로 소문난 강항소년을 만나기 위해 영광 유봉마을에 들렸다. 신을시는 마을에 들어서자 마자 강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의례껏 문중어른을 접견하고서는 전라감사 신응시는 어린아이 강항을 만나 공손히 큰절을 하는 강항을 번쩍들어 무릎에 앉히고 머뭇거림도 없이 다리 각(脚)자로 명제하여 글을 지어 보라했다. 


강항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더니 이내 시문을 지어 답하기를“각도만리 심교각(脚到萬里 心敎脚)”이라는 칠언 시(七言 詩)를 지으니 무릎위에 올려놨던 강항을 경배하듯 내려놓더니 얼굴빛을 고치고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러하듯 강항은 문장으로 이미 주위를 놀라게 하였을 정도로 이 지역뿐만 아니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신동(神童)이라는 서울 장안에 까지 번지고 있었다.


7세 때는 유봉마을 근처에서 책장수를 만나 대뜸 맹자 1질을 보여달라는 당돌한 말에 책장수가 어린 강항을 골려줄 생각으로 내기를 걸었다가 한나절동안에 다 암송(暗誦)해 들려주자 마을 정자에 맹자1질을 걸어 놓고 갔다는 일화는 맹자정비로 현존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는 육로(陸路)보다 수로(水路)가 더 빨라 8세에는 염산 논잠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무장현 칠암 포구에서 구암리로 죽곡 이장영문하로 출입하던 중 칠암마을의 유림들로부터 신동이 이곳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강항을 불러 세웠다.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 오는 통감강목은 중국고서로 중국의 고대역사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어 매우 어렵고 까다롭기로 소문이 난 역사서이다. 이러한 역사서를 하룻밤 만에 읽어 그 다음날 아침에 들려주니 주변에 유림들이 하나같이 ‘장안에 소문난 신동(神童)이 지금 우리 앞에 있노라’며 그중 연장자 유림이 나서서 이곳 칠암마을을 강목촌으로 명명한다고 선언한 강목촌의 일화(逸話)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강항은 16세에는 책문으로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는 향선 3장 시험에 합격하여 이름을 드높였다.


이어 22세에는 진사시에 합격했다. 22세가 되자 이 해 진주 김씨와 결혼을 하였고 안정된 가정에서 이미 과거에 합격한 맏형인 저어당 해(瀣)와 둘째 형인 퇴은공 준(濬)에 이어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


강항이 1591년 25세에 첫 번째로 큰 화를 입고 만다. 3세에 사서오경을 가르친 맏형 저어당 강해(姜瀣)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강항에  못지않은 유학자이기도 한 강해(姜瀣)를 무능한 군주 선조는 강해(姜瀣)를 매번 칭찬했다.


왕실에서 경연이 펼쳐질 때마다 선조는 만조백관 앞에서‘호남의 문장가는 강해(姜瀣)’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문장가인 강해(姜瀣)를 절대군주인 선조는 정여립사건에 연루시켜 신묘사화 연류자로 몰아 백형 저어당(齟齬堂) 강해(姜瀣)를 가차없이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강항은 이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애상(哀傷)해 하였으며 이후 겉으로 그러한 어두운 자취를 감추면서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며 지켰다.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라는 인물이 등장해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했다.(1591년) 통일을 달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9풍신수길)는 국내의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무사들을 모아 대륙출병의 야욕을 호시탐탐 불태웠다.


오랜 기간의 내정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조선과 명나라로 방출시키고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9풍신수길)는 일본내의 불안정한 통일로 치안이 불안했던 왜국의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의 무모한 무력을 억제시키면서 조선을 넘어 중국까지도 지배하겠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빚어진 정유재란은 1597년(선조31년)에 도요토미히데요시는 1차 임진년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을 첫 번째로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탓으로 분석했다.

두 번째로 호남의 의병을 원인으로 꼽고“거느적 거리는 대상(노인과 부녀자, 어린이 등)은 모조리 죽여도 좋다. 다만, 먹물이 튄 선비와 기술자는 너희들 머리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기에 절대 죽이지 말고 목숨만 겨우 살려서 데려 오도록 하라.”고 밀명을 부하들에게 내렸다.


이러한 밀명 속에서 진행한 정유년 2차 전쟁에서 왜군은 전라도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어 갔으며 포로로 끌고 갔다. 이들이 벌인 정유재란은 전라도는 한순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랑이 되었다.


왜의 육군은 호남의 길목인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를 거쳐 익산까지 올라갔다. 조선 수군은 6월 안골포, 7월 웅포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러나 9월 16일 이순신은 12척의 함선으로 130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함으로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다.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떠나 고군산 군도에 머물기까지 보름 남짓한 기간 일본 수군은 전선을 정비한 뒤 곧장 조선 함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이 때 강항은 집안회의를 거쳐 30여명의 일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이순신장군 진영으로 들어가 싸우기 위해 항해 뱃길에 올랐다.


강항은 부친인 강극검공이 탄 배와 어긋나고 뱃사공인 노비의 불찰로 칠산바다를 배회하다가 우여곡절속에서 1597년 9월 23일 칠산 바다의 시작점인 논잠포 앞바다에서 도도 다카도라의 휘하 수군에게 피로(被擄)되고 만다.   


이처럼 피로(被擄)되어서도 강항과 둘째 이씨 부인(애생이 엄마)은 참으로 모진 인연이 있어 정유재란 당시에도 가슴을 에이는 통한(痛恨)의 인연은 계속된다. 논잠포 앞바다에서 이씨 부인은 이미 예고도 없이 강항과 생이별을 했기에, 지아비와 첫째 김씨부인 가족이 논잠포에서 순천 앞바다까지 끌려가는 내내 서로 생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밤중 끌려가는 아비규환 속에서 이씨 부인은 강항의 식솔로부터 홀로 떨어져 저쪽 건너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여가 지났을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순천 앞바다에서 애생이 엄마(이씨부인)의 외침을 저 건너편 배편에서 처음 듣게 된 것이다.“영광사람 어디에 없소? 영광사람 어디 없소?”이날 이씨 부인의 흐느낌과 외침은 처절하다 못해 듣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하는 절규의 외침이었다.


아니 냉기로 가득한 남해 바다를 온통 한으로 적시며 그 통곡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며 애처롭고 처절하고도 가냘프게 바람에 묻어 날려 오고 있었다. 이러했던 둘째 이씨부인은 왜놈들의 다른 배에서 통곡을 하듯 소리를 지르다가 곡기(穀氣)를 끊고 왜놈들에 의해 맞아 죽고 만다.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왕은 무엇이며,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무엇하러 있는가.”강항은 가족도 못 지키고 나라도 못 지키는 자신의 무력함을 원통해하면서 현해탄을 건너가는 일본군의 뱃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강항가족은 노부신치로 군대에 잡혀 전쟁의 원인이 된 대마도를 거쳐 쓰시마 섬과 이키 섬을 지나 쓰시마해협 시모노새키를 지나서 시코쿠 지방 이요의 오즈성으로 끌려갔다. 당시 왜국은 무사들이 지배하는 시대로 일반 백성은 거의 글자를 몰랐으며 권력자였던 장군들도 글을 몰라 전장에 나갈 때도 승려를 데려가 글을 써서 소통하였다.


이 시대에 왜의 유일한 지식인층은 승려들이었다. 승려들은 불교 경전 이외에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왜의 승려들 가운데 신유학에 관심있는 승려들이 많았으나 아직 신유학이 일본에 보급되지 않았다. 왜국의 승려들은 도의와 예의를 숭상하는 조선의 예학, 정치, 관제 등을 동경하였다. 왜의 유일한 지식인층은 승려들이었기 때문에 왜국 백성들이나 무사 권력자들은 승려를 존경하고 우대하였다.


오즈성의 장수 노부신치로는 강항이 포로가 된 이후에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의관이나 행동을 보고 대학자임을 알아보고 오즈성에 포로로 잡혀 있지만 특별히 우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강항의 실기체험문집인 간양록에 보면 오즈성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즈성에서 가까운 금산 출석사의 중 요시히토(호인)이란 사람은 자못 문자를 해독하였습니다. 그는 신을 보고 슬프게 여겨 예우가 남보다 더했으며 어려운 일을 도와주기도 하였지요.“ 학문으로 요시히토의 마음을 산 강항은 공부를 핑계로 왜국의 문헌을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요시히토는 제 나라의 사적에 관한 문헌을 서슴지 않고 보여 주었다.
강항은 이를 모조리 옮겨 베끼었다. 거기에다 자신이 직접 본 왜국의 형세와 정보, 국방대책을 임금에게 올렸다.


당시 왜인들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탐하여 서적, 목판, 활자본, 공에품 등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강항은 킨잔의 제5대 지주인 카이케이를 만나 한시(漢詩)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는데 그가 국가 기밀인 일본의 전국 지도를 은밀히 보여 주기도 했다.


오즈성에 있던 강항이 교토 후시미성으로 옮겨간 것은 1598년 6월이다. 명량대첩에서 패퇴하고 귀국한 도도 다카토라가 교토로 귀국해 들어왔기 때문에 피노된 강항을 보낸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귀족의 자제들 가운데 학식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승려가 되었다.


귀족의 자녀들만이 승려가 되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것이다. 강항은 교토로 이송되어 일본 승려와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여기에 의사인 의안과 이안이 강항을 가끔 찾아와 필답으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처럼 강항이 1560년 31세가 되어 일본 교토 후미성에서 여섯 살이나 더 많은 왜승(倭僧) 순수좌(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의 뛰어남을 필담으로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간청하여 사제지간의 연으로 마침내 제자(弟子)로 받아들인다.
 

이때 순수좌에게 강항을 소개한 왜군의 장수인 적송광통은신유학에 갈증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당신들의 나라 왜는 철천지 원수와 같은 나라이며 장군들이라는 사람들은 개, 돼지보다도 못한 놈들’이라고 이를 갈았던 강항에게 순수좌는 여느 왜인하고는 달랐다.


순수좌 역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폭정에 이미 질려 있었고 중국이나 조선이 왜국을 침략해 순수한 왜 민족을 보호해줬으면 한다는 대화를 나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강항은 순수좌와 속마음을 툭 터놓고 대화를 끊임없이 갖게 되었고 순수좌의 마음을 안 강항은 성재기와 사상와기를 직접 적어 성과 와를 아호로 내려줘 마침내 등원성와 즉 후지와라 세이카로 재탄생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후지와라세이카라(등원성와)는 왜의 유학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후에 ‘일본 유교의 개조’가 된다.
이처럼 필담(筆談)을 통해 강항 휘초 16종 21책을 전수받게 되었으며 사서오경을 발문해 일본유교(日本儒敎)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이미 강항은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을 넘어 조선의 유교경전과 주자학(朱子學) 사상으로 도학(道學)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유학자로서 손색이 없는 최고의 지성의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 당시 왜국에서는 전쟁을 싫어하는 1% 식자층 부류의 승려계급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왜승(倭僧)으로 신유학 사상에 잔뜩 목말라 있었으며 최고봉에 오른 강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경제부국을 말하는 현대 일본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역사에서는 가정법이 없지만 불을 보듯 뻔 한 것은 강항의 적중 봉소에 의하면 이 당시 왜놈들의 99%가 무지(無知)랭이 민족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1560년 무렵에서야 일본의 역사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끝나고 에도(江戶) 시대가 시작될 때를 기준으로 중세(中世)와 근세(近世)로 나뉜다. 같은 봉건시대면서 왜 시대를 나누는 것일까? 그것은 생활문화의 변화에 기인한다.


1560년 이전까지는 종교불교의 영향이 컸으므로 학문은 승려를 제외하면 일부 학자 또는 특권 계급만이 누릴 수 있었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유학의 전파로 인한 영향으로 종교를 배제한 합리적인 교육이 일반 대중 사이에 확산되어 사숙(私塾)과 데라고야(寺小屋)와 같은 서당에서 일반 왜인들도 봄날의 불꽃처럼 신유학이 일본열도에 거국적으로 뻗어 나갔다.

'하늘 천, 따 지...공자 曰, 맹자 曰….‘

크게 소리를 내어 읽으며 무릇 교육과는 인연이 없던 일반 서민들이 처음으로 글자를 알고 학문에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척박한 사무라이 무사시대에서 기초가 다져진 신유학은 곧바로 이어지는 명치유신을 몰고 왔다. 왜인들의 근세 문화의 개막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목숨을 건 활동이 뒷받침되었다.


피로된 강항은 이역만리(異域萬里) 왜놈들의 따에서도 충효사상과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정신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바르게 정립하면서 하루도 심의(深衣)를 벗지 않고 조선선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생활했으며 적국에서도 항상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에 순수좌는 유교의 복심이랄 수 있는 심의(深衣)에 동경하게 된다. 강항이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면서 선비로서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고 의관을 정제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한사코 심의의 제작과정에 매달리게 된다.


거듭 순수좌의 열정에 감동을 받은 강항은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의관의 정제기술까지 전해주게 된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이를 통해 일본 강호 막부 문화에 주자학을 뿌리내려준 인물로 일본 유교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으며 현대와 이를 증명하듯 일본 오즈시에서는‘홍유 강항선생 현창비’를 세워 매년 추모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을 해 2세교육의 장으로 역사에 그를 중요한 인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유학의 원조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족적을 남기고 일본에서 유명한 일본인 당시 유학자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모든 일본 유교 책자에는 조선에서 정치의 근본이 된 신유학을 비롯해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모든 유학 서적들은 강항(姜沆)선생에 의해 선생이 발문(跋文)하여 선생의 머릿속의 학문만을 베껴 쓰고 그가 갖고 있는 지식이 일본의 서책(書冊)들로 만들어 졌기에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의 텍스트임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충분히 영악한 근대와 현대의 일본학자들은 이후 앞 다퉈 중국 현지의 원서(原書)와 검증해본 결과 강항이 발문한 서책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문서임을 입증하고 나서야 그의 위대함을 재삼(再三) 인정해 오-즈시에 성역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유재란의 폐해(弊害)로 빚어진 왜놈들의 포로생활 중의 강항의 가르침이 곧 지금의 일본의 근대사의 지표(指標)가 되었고 일본의 진정한 근대사 유교가 되었다.


또, 어제와 오늘의 일본에 명확하게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놀랍게도 이를 발전시켜 명치유신(明治維新)과 화(化)사상으로 변화를 꾀하여 이와 같은 학문의 원동력으로 일본경제가 바로서고 사회질서가 잡혀 지금의 일본이 반듯하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항은 당시 일본 고승들에게 경전(經典)을 써주기도 하고 성리학(性理學) 정주학을 가르쳐주는 등 조선유교의 진수를 일본에 전파함으로서 식자층의 일본인들이 지금도‘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라고 부르며 그를 공경(恭敬)하고 있다.


강항(姜沆)은 이토록 포로생활 속에서도 일본 유일의 지식층인 순수 좌 후지와라 세이카와 성주 아카마쯔 히로미치(赤松廣通)에게 유교를 전파해 근대일본이 제대로 정립되도록 했다.


이 부분도 <간양록>을 살펴보면 당시 강항은 은전을 벌어서 귀국할 배를 마련하고자 왜승 순수좌를 통해서 글씨를 팔았음을 기록하고 있다.그런데 강항은 신유학에 대한 세이카의 열의에 감탄해 그에게 신유학을 가르쳐 주게 되었으며 예법에 대하여도 많은 지식을 전수하였다.


현재 일본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는 강항이 포로 생활을 하면서 쓴 책 강항휘초가 수진본으로 소장돼 있다. 사서오경과 신유학의 기본 이론서들이다. 이중 일본 신유학의 기반을 조성한 것이 사서오경 훈점본이다. 강항이 원본을 쓰고 순수좌가 일본어로 훈을 달아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왜인은 겨우 사서오경을 자기네들 말로 읽을 수 있었다. 결국 강항이 일본 유교의 비조로서 씨를 뿌린 것이다.


이처럼 강항은 간양록을 통해 “내가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다지마 성주 아까마쓰 히로미치와 순수좌 덕분이었다. 순수좌는 생활비와 돌아갈 때 쓸 비용도 마련해 주었다. 아카마쓰는 증명서를 얻어 주어 관문들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주었고, 순수좌는 사공 한사람을 더 붙여 주어 대마도까지 항로를 인도하게 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도움으로 1600년 5월 19일 강항의 가족과 포로로 잡힌 선비 등 모두 38명은 꿈에도 그리던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다. 강항은 온갖 고초와 수모를 감내하고 기필코 돌아왔다. 그러나 어린 아들과 딸 조카를 잃었고 이씨부인을 잃었고, 끌려가면서 죽고 또 일본에서 죽어간 많은 동족들을 생각하니 나라에 뽑힌 선비로서 부끄럽고 비통해 했다.


“선비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나라를 빼앗아 가는 도적들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수 없는 선비는 왜 필요한가. 선비도 싸울 힘이 필요하구나. 글만 읽는 선비보다는 싸울 힘을 갖춘 선비가 되어야 한다.“ 강항은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강항은 선조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서 선조로 부터 왜의 현지 상황에 대하여 물었고 강항은 자신이 파악한 것들을 정리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조정은 강항에게 대구교수를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물러나 후학을 양성에 힘쓴다. 이어 순천교수를 임명하였으나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하고 또 다시 사양한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두 번의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이 죽었고 논밭은 황폐화 되었다. 나라는 여전히 시끄러웠고 나라는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흔들렸다.“아, 누가 이 나라를 붙들어 세울 수 있는가. 누가 상처투성이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는가“ 강항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왜의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는 임진 정유년 침략으로 조선을 유린(蹂躪)하고 초토화하였으나 끝내 점령하지는 못했다.


성웅 이순신장군의 지략과 목숨을 바친 투혼으로 일본을 물리쳤다.그러나 조선의 강토는 초토화되고 수많은 백성이 죽고 육신이 온전한 백성이 드물었다. 일본도 7년간의 무모한 전쟁으로 국력은 크게 소진되었다. 그러나 강항은 일본이 국력을 회복하면 다시 기필코 쳐들어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그래서 일본에 피로(被擄)되어서도 훗날의 재침에 대비하도록 일본의 지리와 산업, 제도 등 모든 것을 기록하여 몰래 조선 조정에 목숨을 걸고 적중봉서를 보냈던 것이다. 강항은 포로의 신분이면서도 일본의 최고 학자 순수좌 등 고승들에게 신유학을 보급하고 가르쳤다.


그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최고의 승려들을 통해 길(정치)을 물었다. 토요토미는 무력을 과시하는 무단정치를 신봉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는 고승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대학을 배우는 등 예(禮)와 문(文)을 숭상하는 도덕정치로 통치 방향을 바꿨다.


그 결과 일본은 임진, 정유년의 침략 이후 300년 간 조선을 침략질을 하지 않고 문화 융성기에 들어간다. 거기에는 강항이 가르친 순수좌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이순신은 칼로 나라를 지켰고 강항은 붓으로 나라를 지켰으며 강항은 여기에 하나를 더해 일본인을 가르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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