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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 (순천교수와 대구교수직 사양 편)

소생이 비록 형편이 없는 사람이지만 성격이 참으로 꼬닥 꼬닥하여 겉으로는 비록 달게 받은 척하여도 속으로는(음해성 언어)견딜 수 없는 터라...
등록날짜 [ 2021년09월13일 11시10분 ]

수은강항의 연보를 보면 선조 34년 1600년 경자(34세)봄에, 오즈 성주 사도(佐渡, 이순신장군에 대패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부하 )에게 순수좌의 권유로 귀국을 위한 편지를 보내고 당시 교유(交遊)했던 왜승 경안(慶安)이 적극적으로 권하여 마침내 대마도를 거쳐 거제도 장문포(장목)으로 1600년 5월 19일에 피로인(被擄人) 38명을 사서 귀국하게 되었다.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동년 1600년에 선조의 소명(召命)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 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과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를 지어 올리니 말 한 필을 하사받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고 실기문학의 진수인 건거록 필사본을 완성하였다.


이어 다음해인 선조34년 1601년 신축 萬曆29년 35세)에 당시 조정에서 등용(登庸)을 권했다. 하지만 강항은 스스로 죄인이라 칭하였다. 거듭 선조 42년 1608년 무신(42세)에는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결단코 부임하지 않았다.

여기에 선생의 강직한 성품까지 엿보이는 글로 ‘박 태수께 올리는 글(상(上) 박 태수 서(書))’를 영호남을 넘어 순천교수와 대구 교수(단, 행장 기록에 의하면 이 무렵 대구교수직에 잠깐 봉직한 기록이 존재함)직에 대해서도 원문 그대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박 태수께 올리는 글(상(上) 박 태수 서(書))

[마땅히 신사효(辛思孝)의 글 위에 있어야 한다.]

가물고 더운 날씨가 요사이(요즈음) 심한데 엎드려 살피노니 고을의 다스림은 어떠하신지요. 부족한 사람(에 대해 박 태수께서) 사모함이 꿈속에도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順天의 향교(소속) 노비(校奴)가 가지고 온 장계를 보니 소생으로 순천 교수(順天敎授)를 삼는다고 했는데 고을의 교수직이 비록 散官이라고는 하나 소생으로서는 이를 얻은 것도 화려한 직함입니다.

하물며 죄인의 처지 속에서 씻어내어 관직의 끝자리에다 올려주니 그윽이 헤어(아)리 건데 寒谷에 봄기운이 나는 것이 모두가 현명한 태수께서 죄를 씻어준 덕이니 감사한 마음 무어라고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포로로 잡혀갔던 죄인의 남은 삶이 감히 선생의 자리를 맡을 수도 없으려니와 또, 들은 바에 나라 속에 도는 말이 소생의 임명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하니 무턱대고 부임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소생이 비록 염치가 없다지만 감히 향교교수의 자리에 얼굴을 들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소생의 사사로운 정리가 참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다만 이 한줄 글뿐만이 아닙니다. 왜냐면 무릇 사람의 심정이 누가 헤아리지도 않게 포로로 몸이 빠지기를 원하리요 만 한 번 환란을 겪은 뒤로는 모든 일이 갈라지게 되어 여러 사람의 눈이 흘겨보면서 모두 劉與 劉與之?

의 賦를 싫어합니다. 이래서 더욱 산골에 자취를 숨기고 (물)고기나 (산)새로 짝을 하고 사슴으로 벗을 하여(삼아) 남은 목숨을 다하고자 하는데 관인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이 고을을 지나는 사람이 혹시 옛날의 정으로써 부르면 감히 도도하게 불러도 안가고, 가라고해도 안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가 없으므로 억지로 관인들이 모인자리 가에 참여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형세가 그리되는 것이지 본심은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뜻밖에 남의 구설수에 오르는 수가 있지만 이따금 문밖에를 나갔다가 헐뜯는 소리가 혹 이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거나 하지는 않고 스스로 타고난 운명을 운수가 사납고 복이 없다고 생각해버리며 한번 죽음이 빠르지 못함을 한탄할 따름입니다.

아! 사람이 혹은 만 권의 책을 읽고도 一名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고, 혹은 겨우 일명을 얻은 채 최초의 사령(一命 : 一級의 官)도 무릅쓰지 못한 사람이 있고, 그 아래로는 품관이나 교생이 된 사람도 있고, 또 그 밑으로는 農, 工, 商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소생은 본시 漢南의 進士로써 외람되이 진사급제에 참여를 하였는데 앞서 얻었던 尙書郞(주 :선생은 공조, 형조좌랑의 관직을 거쳤으나 중국식 표현으로 잘못된 해석이 수은집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임)의 관직이 이미 복이 지나쳐 재앙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금호아시아나 이원태고문께서 바로잡은 문맥

지금은 깊이 들어앉았다가 드물게 나다녀도 오히려 모욕당함을 면하지 못하는데 한번 나서서 관리가 되어 관모를 쓰고 품대(烏角)를 허리에 띠고 紅黑의 공복을 몸에 입고 관인들과 더불어 관청집무실에 줄지어 앉게 되면 여러 사람의 손과 눈길이 반드시 서로 가리키고 보며 끌어내어 비웃고 업신여겨 반드시 이가 시리도록 할 터이니 소생이 비록 형편이 없는 사람이지만 성격이 참으로 꼬닥꼬닥하여 겉으로는 비록 달게 받은 척하여도 속으로는 견딜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아주 많이 생각했던 바이므로 벼슬이 높아진다는 한 가지 일은 꿈속에도 없었던 바입니다.

다만 생각하면 바다(현해탄)를 건너오던 날에 무거운 형벌을 받을 각오를 했었던 것인데 임금의 은혜가 하늘같아 다시 세상에 놓아주시고 나라 안에서 의식을 하게하고 평민의 대열에 서게 해주셨으니 몸이 부숴(셔)지도록 충성을 한다 해도 우러러 보답할 길이 없고 이도 빠지고 머리도 벗겨진 나이에 그저 임금님의 장수만을 빌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소생의 죄란 것은 참으로 스스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요, 춘추의 책에도 사람의 다시 허물을 고치는 것을 허용하였고 綱目의 책에도 사람의 의리로 옮아감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華元이 송나라 장수로서 군사가 패하여 鄭나라에 사로잡혔지만 돌아오자 그의 다시 돌아옴을 書에 기록하였고 孟達이 新城을 지키다가 항복하여 魏나라에 항복을 했으나 다시 蜀나라로 돌아와 죽자 綱目에 그 절개 지켜 죽음을 썼습니다.

소생은 비록 형편이 없는 사람이지만 실상 나라를 팔았다거나 항복을 한 사람이 아니요, 만 번 죽을 고비 끝에 한목숨이 아직 남았으니 충신, 열사의 옛 자취를 혹시 바라볼까 하지만 같이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집집마다 찾아가 설명을 해줄 수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천지의 사이에 눈을 뜨고 보아도 글하는 선비로서 사로잡혔다가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오직 이 몸뿐입니다.그래서 언제나 실망을 하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사람들의 말이 옳다. 내 죄가 크다. 나라의 밥이 너그럽다. 한번 죽음만 남았거늘 다시 무슨 말을 하리요]합니다.

아! 아득하게 오래된 천지의 사이에 길게 살아봤자 불과 6-7십년의 손님이요, 하물며 소생은 비록 세상에 살고는 있다고 해도 시들시들하여 저승의 사람과 같으니 더욱 구차하게 살아남은(瓦全)이 정당하게 죽음(玉?)함만 못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輪迴說이 만일 헛된 소리가 아니라면 오직 일직 죽어서 빨리 뒷 삶을 얻고 싶을 뿐이요, 지금의 삶에서는 다시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아! 구구하게 스스로 말을 해봤자 속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듣기를 싫어하는데 오직 현명한 태수께서는 본디부터 저를 안타깝게 여겨 주셨기 때문에 하나하나 적어서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 말하오니 만일 소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저더러 [배회하면서 뒤를 돌아보고 높이 직급이 바뀌기를 바란다]고 한다면 이는 이 마음을 몰라주는 탓입니다.

옛날 徐孺子가 평생 동안 여러 선생의 부름(?辟)에 응하지 않았으나 그의 喪을 들으면 곧 솜에 술을 담가 말려가지고 천리 길을 나서서 갔다고 합니다.
무릇 孺子같이 고상함으로도 오히려 그랬었는데 하물며 소생과 같이 매우 천한 사람이 외람되이 대인의 收拾함을 받았으니 사사로이 은덕을 느낌이 실로 부임을 하고 부임을 안 하고를 따져 얕고 깊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현명하신 태수께서는 살피옵소서.



수은 강항의 하심(下心)철학

강항은 '順天의 향교(소속) 노비(校奴)가 가지고 온 장계를 받아 보고' 영광 고을 태수에게도 이처럼 스스로 죄인이라 칭하며 순천교수직을 사양하는 글을 초연하게 문맥마다 당시 시국을 짚어가면서 이어가 보기로 한다.
 
“죄인의 처지 속에서 씻어내어 관직의 끝자리에다 올려주니 그윽이 헤어(아)리 건데 寒谷에 봄기운이 나는 것이 모두가 현명한 태수께서 죄를 씻어준 덕”이라 말하며 “나라 속에 도는 말이 소생의 임명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하니 무턱대고 부임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소생이 비록 염치가 없다지만 감히 향교교수의 자리에 얼굴을 들고 나갈 수 가 없습니다.”이라며 향리(鄕里)에 묻혀있어도 국내의 정세를 다 파악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어 강항은 “산골에 자취를 숨기고 (물)고기나 (산)새로 짝을 하고 사슴으로 벗을 하여(삼아) 남은 목숨을 다하고자”하며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거나 하지는 않고 스스로 타고난 운명을 운수가 사납고 복이 없다고 생각해버리며 한번 죽음이 빠르지 못함을 한탄할 따름입니다.”라면서 선비의 인의(仁義)정신을 말한다.


당시 향교의 기능과 관리역할론

이어 “관청집무실에 줄지어 앉게 되면 여러 사람의 손과 눈길이 반드시 서로 가리키고 보며 끌어내어 비웃고 업신여겨 반드시 이가 시리도록 할 터이니 소생이 비록 형편이 없는 사람이지만 성격이 참으로 꼬닥 꼬닥하여 겉으로는 비록 달게 받은 척하여도 속으로는 견딜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라고 왜에서도 두 번의 탈출 중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경고한 벽서사건(壁書事件)에서 대담함과 인의정신이 그대로 들어나듯 성품을 숨기지 않고 올곧게 주장하기도 한다.

수은강항은 선비로서 임금과의 충의(忠義)정신을 아로새긴다.

“임금의 은혜가 하늘같아 다시 세상에 놓아주시고 나라 안에서 의식을 하게하고 평민의 대열에 서게 해주셨으니 몸이 부숴(셔)지도록 충성을 한다 해도 우러러 보답할 길이 없고 이도 빠지고 머리도 벗겨진 나이에 그저 임금(님)의 장수만을 빌 뿐입니다.”라고 글을 이어가면서도 “소생의 죄란 것은 참으로 스스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요, 춘추의 책에도 사람의 다시 허물을 고치는 것을 허용하였고 綱目의 책에도 사람의 의리로 옮아감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어 “소생은 비록 형편이 없는 사람이지만 실상 나라를 팔았다거나 항복을 한 사람이 아니요, 만 번 죽을 고비 끝에 한목숨이 아직 남았으니 충신, 열사의 옛 자취를 혹시 바라볼까 하지만 같이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집집마다 찾아가 설명을 해줄 수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천지의 사이에 눈을 뜨고 보아도 글하는 선비로서 사로잡혔다가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오직 이 몸뿐입니다.”라며 당시 선비로서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고 미리 국가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 조선을 중국의 역사서인 강목을 말하며 선비답게 회생함을 떳떳하게 밝힌다.

특히 당시의 수명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밝히면서도 왜국에 간난신고과정으로 스스로의 건강이 이미 쇠약(衰弱)해져 있음을 불과 서른인 이립(而立)의 나이임에도 숨김없이 내 비친다.

“아득하게 오래된 천지의 사이에 길게 살아봤자 불과 6-7십년의 손님이요, 하물며 소생은 비록 세상에 살고는 있다고 해도 시들시들하여 저승의 사람과 같으니 더욱 구차하게 살아 남은(瓦全)이 정당하게 죽음(玉?)함만 못하다는 것을 느낍니다.”며 죽음의 그림자를 넘어 “輪迴說이 만일 헛된 소리가 아니라면 오직 일직 죽어서 빨리 뒷 삶을 얻고 싶을 뿐이요, 지금의 삶에서는 다시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러한 절망감을 떨쳐 버리고 싶은 강항 의욕을 강조한다.

이처럼 수은 강항은 그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부러질망정 꺽이지 않는 올곧은 선비정신(도학, 절의, 학문숭상)을 가지고 인의(仁義)를 지키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정신이 그 시대정신으로 남아 조선을 500년 동안 유지하게 하였다.


무릇 인간이 태어나 한 세상을 살면서 작게 든 크게 든 고난의 역사가 현실에서는 생로병사로 다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 위인(偉人)에 대한 역사적 인 글을 통해 얻고자 함은 실로 지대(至大)하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인성교육을 받는 이유가 한 인물의 위대함에 대해 우리 모두가 존경심과 더불어 닮아가고자 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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