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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파산사현서원 편)

성수침(成守琛)·성수종(成守琮)·성혼(成渾)·백인걸(白仁傑)을 봉향(奉香)한 사현서원으로 수은강항, 성혼(成渾)의 문인
등록날짜 [ 2021년09월26일 15시46분 ]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파평면(坡平面) 납로리(納老里)에 있는 파산사현서원을 일컫는데 성수침(成守琛)·성수종(成守琮)·성혼(成渾)·백인걸(白仁傑)을 봉향한 서원으로 수은강항이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사현서원(四賢書院)으로 더 이름이 나 있다. 조선 선조(宣祖) 원년(1568)에 건립하였고, 효종(孝宗) 원년(1650)에 사액(賜額)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아마 수은선생이 사계서원의 찰륜당 상량문을 지은 시대적 상황을 보면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라고 해 그 유명세가 전해지고 있다.


수은선생은 아래 상량문 중간부분에서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에 중수됨을 기록을 통해 밝히고 있지만 사현서원 촬륜당(四賢書院 察倫堂)상량문을 1600년 초에 귀국 후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이 파산사현서원의 상량문은 당시 수은선생에 대한 조선에서 인지도를 가름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의 가치를 지닌 글이라 말할 수 있다. 필자의 어렸을 때 기억이니까 1960년대 무렵에 당시 선친께서 네 칸의 기와집을 착공하시면서 한학(한문학자)으로 명성이 자자한 분을 찾아 (상량문 글에 대한 금액도 예민한 부분이지만 근 달포동안 물색) 그 분에게 상량문 글을 받아 온 수고로움을 기억한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지금은 ‘상량문’이라해 봐야 몇 줄 한자로 적고 처음과 끝 글자가 거의 용(龍)이나 거북을 상징하는 구(龜)자를 넣어 끝을 맺는데 그나마 남아 있는 관습(慣習)이다. 상량문은 대들보가 다 설치된 다음에 마룻대(종도리, 즉 건물의 가장 높은 위치에 세로로 놓인 큰 기둥)를, 서까래들이 이 마룻대에 걸치게 된다.


마룻대를 올리면 집의 골격은 거의 다 완성되어 힘든 과정을 넘겼다는 뜻에서 마을잔치 분위기속에 공사에 참여하는 인부와 목수 그리고 일가친척을 불러 ‘상량식’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서원(그것도 사현(四賢)을 봉향하는 인재의 요람)의 상량문은 현재의 광주향교의 명륜당에 설치된 수은선생의 상량문 같이 보통 편액(扁額)으로 영구히 보존한다.


하물며 사현(四賢)의 인물과 수은선생에 대한 연결됨에 미루어 짐작해 보면 아무나 그냥 상량문을 짓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 냉정함으로 엄숙하게 아래의 글 즉 수은집 2권에 수록되어 있는 원문이 해석된 글을 드린다.

·坡山의 四賢書院 察倫堂의 上粱文
(坡山四賢書院察倫堂上粱文)


용문(龍文)의 옛터를 잡아서, 벌써 사우가 아주 새로워졌고, 鹿洞의 구규(舊規 : 朱子의 白鹿洞規)를 밝혔음에 강당을 중건하지 않을 수 있나(없었다.). 이로써 후학에게 도움을 주고 이로써 선사(先史)를 빛내도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聖代의 文을 숭상함으로 인하여 蔚然히 어진 인재가 뒤를 이어 낫고, 吾道가 남으로 옴으로부터 네 선생이 잇따라 났고, 百川을 막아 동으로 흐르게 함은 趙문정(文正)같은 이가 없었다.


하물며 坡山의 一邑은 魯나라처럼 현인이 많은 곳, 높으신 聽松의 倫에 으뜸이 되심이여 실로 靜庵의 정맥을 얻으셨도다. 한겨울의 松柏같아 호강후(胡康候 : 五季時 胡安國)의 모습이오. 霽月이며 梧桐이라.


소요부(邵堯夫 : 邵康節)의 胸衿이라, 竹雨와 松風속에 흔연히 도를 즐기며 세상을 잊었고 용처럼 서리고 봉처럼 뛰어나 끝내 자신을 굽히고 남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 몸만 깨끗이 하여 윤리와 강상을 어지럽힘이리오.


족히 완고한 이를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이를 서게 하도다. 다행히 학이 울면 새끼가 화답하듯이 이(? : 孔子의 子, 字는 백어(伯魚)) 庭처럼 牛溪가 났도다. 채서산(蔡西山 : 蔡元定, 朱子 弟子)의 연원이 모두 가르침을 받았고 劉南康 부자(??과 그 아들인 子羽 子? 宋人)가 서로 지음(知音 : 知己)이 되었다.


발이 丘園에서 나서기 전에 사람들이 이미 산두(山斗 : 泰山北斗0처럼 우러렀으므로 도의 탄탄함을 밟았고 비록 스스로 즐기며 세상에 나서지 않으려 했으나 禮幣의 초빙 여러번 내렸으니 人爵이 스스로 옴을 어찌하리오. 마땅히 백성을 보호하고 임금을 받들리라 하였는데 결국은 피해가서 벼슬을 버렸도다.
 

탁연하도다. 休庵이여! 또한 높은 절행이 있어 바른 도와 바른 학문 師友 사이에서 얻었고, 곧은 의론과 높은 말이 殿陛 위에서 나앗도다. 五鹿 五鹿의 角 : 한의 五鹿人. 充宗이 일찍이 易經을 논하다가 朱雲에게 꺾이니 時人이 말하기를 五鹿이 높고 높은데 朱雲이 그 角을 꺾었다고 하였다.


의 뿔을 홀로 꺾으니 萬馬의 울음이 모두 멈췄다. 西塞의 雲山에는 澹庵의 귀양살이 氣節이 죽지 않았고 南都의 鐵壁으로 宣廟의 初元에 즈음 하였다. 백세후에라도 바람을 들을진대 하물며 한고을에서 親炙함이랴.


아! 장하도다. 율곡이여, 松堂에게 미쳤도다. 하늘이 낸 사람의 호걸이니 오백년만에 세상에 이름난 분이오 산수가 기이한 곳에 一千錢 一千錢 : 梁의 ?으로 이웃이 되었도다. 몇 해를 延康里 속에서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邇英殿으로 오르셨도다.


法筵엣이 第一義는 여원명(呂原明 : 송나라 呂榮公希哲)의 격언이오. 時務를 말한 수천의 마디의 말은 주고정(朱考亭 : 朱子, 考亭은 別號)의 封事라 안타깝다. 백성들의 복이 없음이여, 험한 산골에 머물러 빛이 없었도다. 아, 4현이시어, 일세에 함께 났도다.


비록 태어난 곳, 늙고 젊음에 다름은 있으나 절차탁마하기는 정해진 때가 없었다. 단간목(段干木 : 周時人)이 살던 西河는 땅이 명현을 따라 좋아지고 정강성(鄭康成 : 漢 ?玄의 ?號)의 북해는 사람들이 明德鄕이라 칭하도다.


하물며 두 분 뿐만 아닌 분이 한 군데 모였음이랴. 서로 만나면 빙그레 웃으며 앉은 자리에 봄바람이 일고 侍立을 하면 온화한 모습, 문밖에는 겨울 門外冬雪 : ? 눈이 쌓였다.無極太極의 지극한 이치 토론함에 廣信의 아호(鵞湖 : 朱子가 象山과 講?한 곳)와 같고 백자·숙자(伯子·叔子 : 明道 ?川)의 粹言을 강의하니 한천정사(寒泉精舍 : 朱子가 呂東?와 近思錄을 編?한 곳)와도 같았다.


도가 여기에 있었으니 낙이 어떠하리오. 太史가 하늘을 살피고 德星이 오백리 안에 있다 하였고 小子가 학업을 물음에 堂 ?堂 : 孔子의 말씀에 若由也?에 오른 자가 몇 십 명이던고, 빈 몸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왔고 뿌리에 물을 주어 열매를 맺는도다. 마침내 태산이 무너지고 屋樑이 무너짐이여,


사람이 죽자 도가 쇠약해짐을 느끼도다. 더구나 壬辰의 병화에 서원이 한번 불에 다 타버리고 이어서 庚癸 庚癸 : 庚은 穀이요 癸는 水. 즉 財政이 없음을 呼庚呼癸라 함 급함이 있어서 사림이 미쳐 중수를 못했도다.


蘭逕이 이미 묵어 버려서 다시는 勝日의 지팡이가 오가지 못하고 松篁은 스스로 소리를 낼 뿐 맑은 밤의 거문고는 듣지를 못하도다. 다행히도 우리 도 속의 사람들이 자기의 소임으로 알게 되었다. 옛터가 성곽을 등져 지세가 여유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向陽의 자리를 잡고보니 하늘이 아껴두고 기다렸도다. 유구하고 長遠한 규모를 세웠고 경영하여 토목의 일을 감시하였다.


學田을 두어 창고를 채우니 넓직한 千弓餘의 땅이오, 廟의 모습을 새롭게 하여 靈을 모시니 盛德이 반드시 백세토록 향사되리라. 그러나 廣堂이 설치되지 못하여 원포(圓袍 : 衣冠)가 편히 쉴곳이 없었다.


小巫가 大巫를 뵈임에 모름지기 덕을 고찰할 바가 있어야겠고 後覺者가 선각자를 본받음에 마땅히 찰륜(察倫 : 倫理를 살핌)을 우선시해야 한다. 다시 여러 공인을 모집하니 一簣라도 모자랄까 싶어 한다. 여러유생들은 눈을 부릅뜨고 준비를 보살피고 모든 것이 손을 합쳐 이루어진다.


청청 菁菁 : 菁菁者 ? (菁菁 : 초목의 무성함)한 거이 언덕에 있으니 족히 문으로 벗을 모일만하고 양양하게 귀에 쟁쟁하니 시도 외울만 하고 글도 읽을만 하도다. 누가 풀만 우거진 땅이 변하여 采芹 采芹 : 시경. 於樂泮宮可以采芹에서 인용한 말로 學宮을 말함.한 땅이될 줄 알았으리오.


삼가 짧은 曲을 올려 긴 들보를 올리는데 돕노라.

들보를 동으로 던지면 백척 붉은 비탈이 碧空에 섰다. 철장(鐵匠 : 賢哲한 宗師)은 이미 가고 故宅만 남았으니 세간에 누가 다시 松風을 사랑할꼬(聽松을 말함).들보를 서로 던지면 平湖 십리가 긴 뚝으로 막아졌다. 연꽃 일만송이가 모두 그림같고 따뜻한 날 푸른 嵐氣 하나하나 적을 수 없다.


들보를 남으로 던지니 源頭의 活水가 푸르러 쪽빛이라. 어렴풋 천천히 읊조리고 가면서 3월 3일 버들따라 꽃을 찾아 가는듯하다. 들보를 북으로 던지면 方塘이 부평초의 侵蝕을 받지 않아 진흙 속에 그뉘가 白蓮花를 심었던고? 정정하고 깨끗하게 서 있어서 귀엽고야.


들보를 위로 던지면 긴 공중 지나는 새 어데로 가려느냐? 세간에 무엇이고 소침하지 않은 것 없는데 斯文만은 하늘이 상하지 못하도다.들보를 아래로 던지면 선비들 많이 모여 오고 가도다. 宮牆이 높지도 낮지도 않는데 애석하다. 그 문을 얻은 자가 적도다.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한 뒤에 香火가 끊이지 않고 俎豆가 전해지며 入孝出悌로 백행의 근원을 삼고 下學上達로 평생의 일을 삼으며 사방 배우는 자가 모두 귀의할 바가 있게 되고 大夫와 國人이 모두 존경하게 되며, 鶉蛙의 변화(메추리가 개구리로 변함. 즉 反?小人을 말함)는 배우지 말고 각기 鳶魚의 비잠(飛潜 : 道通)을 이룩하게 하소서.



감히 이 글에 첨삭(添削)을 하는 건 결코 옳지 않다.

또, 용어나 중국의 위인, 지명 등 옛 고어를 제외하고는 별로 어렵지 않다. 다만 잘 모르는 부분은(??)물음표로 표기하였으나 더 지식에 목마르면 전자책이 ‘수은집’원문으로 나와 있으니 인터넷에서 참고하면 된다.


다만, 칼럼 식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공통분모(共通分母)를 갖고자 하는 부분만 설명을 해 볼까한다.

상량문 중간에 “坡山의 一邑은 魯나라처럼 현인이 많은 곳, 높으신 聽松의 倫에 으뜸이 되심이여 실로 靜庵의 정맥을 얻으셨도다. 한겨울의 松柏같아 호강후(胡康候 : 五季時 胡安國)의 모습이오. 霽月이며 梧桐이라. 소요부(邵堯夫 : 邵康節)의 胸衿이라, 竹雨와 松風속에 흔연히 도를 즐기며 세상을 잊었고 용처럼 서리고 봉처럼 뛰어나 끝내 자신을 굽히고 남을 따르지 않았다.”


파산사현서원의 근거를 말하면서 명륜(明倫)과 정암 조광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어찌 보면 조선의 선비들은 고려의 유학인 삼은(三隱, 목은(牧隱)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을 적통으로 이어옴을 절의(節義)와 인의(仁義)로 삼고 있다. 이하 호강후~~부분은 얕은 지식은 있지만 감히 설명드릴 수가 없어 안타깝다. 이러한 부분을 더 알고 싶다면 ‘수은집’ 원문을 직접 공부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어 수은께서는 “아! 장하도다. 율곡이여, 松堂에게 미쳤도다. 하늘이 낸 사람의 호걸이니 오백 년 만에 세상에 이름난 분이오 산수가 기이한 곳에 一千錢 一千錢 : 梁의 ?으로 이웃이 되었도다. ”


파산사현서원이 저작자가 스승으로 모시는 이이 율곡에 의해 처음 세워짐을 존경심을 가득해 담아 감탄과 탄성으로 자아내 흠모한다. 흔히 수은강항선생을 퇴계학파라 말하면서 왜국에 퇴계학을 전수했다고 하나 이 상량문을 봐도 퇴계 이황이 아니라 율곡학파임이 여실히 증명되는 문구이다.

계속해 거침이 없는 글이 연속된다. “마침내 태산이 무너지고 屋樑이 무너짐이여, 사람이 죽자 도가 쇠약해짐을 느끼도다. 더구나 壬辰의 병화에 서원이 한번 불에 다 타버리고 이어서 庚癸 庚癸 : 庚은 穀이요 癸는 水. 즉 財政이 없음을 呼庚呼癸라 함.의 급함이 있어서 사림이 미쳐 중수를 못했도다.”


선생은 항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명나라가 물러가기 전까지 구 년여를 ‘십년(十年兵火) 병화’라고 했듯 1568년(선조 1)에 이이(李珥),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된 파산사현서원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역사를 병화(兵火)라 줄기차게 주장히고 있다.

필자는 상량문의 끝 부분에서 “이래서 ‘조선의 선비’라 말하고 ‘선비정신(도학, 절의, 학문)’이구나.”라고 감동을 단숨에 들이킨다. 항상 들보를 동, 서, 남, 북, 위, 아래로 던져라!! 하면서 거침없이 사방육방을 찬가 했던 저작자가 여기에서는 숨을 죽이듯 아래와 같이 읊는다.


“삼가 짧은 曲을 올려 긴 들보를 올리는데 돕노라. 들보를 동으로 던지면 백 척 붉은 비탈이 碧空에 섰다. 철장(鐵匠 : 賢哲한 宗師)은 이미 가고 故宅만 남았으니 세간에 누가 다시 松風을 사랑할꼬(聽松을 말함).


<이하 생략>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한 뒤에 향화(香火, 불교에서 끊이지 않는 공양)가 끊이지 않고 조두(俎豆, 신 앞에 놓인 그릇)가 전해지며 입효출제(入孝出悌, 선비의 가장 낮은 소신)로 백행의 근원을 삼고 하학상달(下學上達, 학습의 가장 낮은 자세)로 평생의 일을 삼으며 사방 배우는 자가 모두 귀의할 바가 있게 되고 대부(大夫)와 國人이 모두 존경하게 되며, 鶉蛙의 변화(메추리가 개구리로 변함. 즉 反?小人을 말함)는 배우지 말고 각기 鳶魚의 비잠(飛潜 : 道通)을 이룩하게 하소서.”


 여기에 한 가지만 더 강조하면서 끝을 맺기로 한다.

조선에서는 5계층으로 사람을 구분 지었다. 왕족과 귀족(공, 후, 백, 자, 남과 같은 제후), 대부(大夫고위 관직) 그리고 선비 즉 사(士)와 일반백성인 평민과 천민, 종 계급으로 나누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대부(士大夫)는 엄격히 말하자면 선비계급인 사(士)와 대부(大夫)로 나뉘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도 사대부라 말하지 않고 굳이 ‘대부(大夫)와 國人이 모두 존경하게 되며,...’ 그래서 수은선생은 광양 수월정 기문에서도 정접의 선친 옥천 선생을 선대부(先大夫)라 칭했다.


결코 사대부가 지금의 사대부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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