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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重修文廟記 편)

[교화(敎化)는 나라의 급히 해야 할 일이 아니요, 세상을 경영하는 선비는 어지러운 세상에 필요가 없다!] 는 사람은 이를 살펴볼지어다.
등록날짜 [ 2021년10월21일 08시58분 ]

‘문묘를 중수한 기문(重修文廟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수은 선생의 그 어떠한 문적에서도 찾아 볼 길이 없어 안타깝다. 다만 당시 수도 한양의 문묘를 세우는 일에도 직접적으로 관여(關與)하여 기문을 설계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역사적 가치로 남는 기록물로 중요성을 간직했으면 한다.
 


문묘를 중수한 기문(重修文廟記) 해석원문

만력(萬曆 : 明神宗年號) 20년 임진(壬辰 : 1592년)에 왜적이 수도(한양)를 침범하여 三宮과 社稷, 宗廟, 文廟를 불태우고 이듬해 계사년(癸巳 : 1593년)에 명나라 군사가 수도를 수복하자 왜적이 嶺南의 변경(邊境)으로 물러났다.


그 해(1593년) 10월에 임금의 행차가 수도로 돌아와 예관(禮官 중앙행정부의 6관(官)의 하나)을 명하여 임시방편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케 하고 성균관(國子)의 관장(大司成 정3품 당상관직)과 부관장을 임명하여 태학(太學 : 성균관 별칭)의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문묘(文廟)의 옛터를 물 뿌려 소제(掃除)하고 문선왕(文宣王 : 공자), 顔子, 曾子이하의 배향했던 뭇 어진이의 위패를 남아 있는 재실에다 봉안케 하고 봄과 가을로 석전제(釋奠祭)를 하며 성균관 소유의 금전과 곡식으로 여러 유생들을 봉양하여 한결 보통 때와 같이 했다.


오직 성스런 문묘(文廟)만은 전쟁의 피해가 진정이 못되고 백성의 힘이 펴지 못한 탓으로 미처 중건(重建)을 못하였었다. 그러다가 27년 무술(戊戌 : 1598년)에 명나라 군사가 호남, 영남의 나머지 왜적을 내쫓아 한꺼번에 바다를 건너가니 다음해인 경자(庚子 : 1600년)에 성균관 유생 백여 명이 8도의 여러 유생들에게 글월을 돌리기를 [문묘를 중수치 못한 것은 우리의 수치다]하자, 8도의 여러 유생들도 소리를 응하여 화답하기를 [문묘를 중수치 못한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하여 서로 주머니를 기우리고 곳집을 털어 육지 길로 가고 바다 길로 가서 모두 수도로 모여드니 기둥과 서까래, 문설주의 용품과 기와며 벽돌의 재료가 곧 바로 모아지고 공인들은 권하지 않아도 잘하고 아전들은 감독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여 某年 某月 某日에 일이 시작되었는데 某年 某月 某日에 공사가 마쳐졌다.


대성전(大成殿)이 다시 널찍하여 바람이 훤히 통한 듯하고 신위(神位)도 깨끗하고 깊숙해 졌으며 윤리를 밝히는 먕륜당(明倫堂)이 있고 학문을 강하는 집이 있으며 곡식을 저장할 곳집이 있고 음식을 준비하는 집이 있으며 서책도 저장할 곳이 있으니 모두가 옛 제도대로 하여 앞서의 규모를 폐함이 없다.


무릇 재물을 쓴 것이 약간이요 공인을 쓴 것이 약간인데 모두 관가의 조그만한 부름이나 명령도 기다리지 않았고 관가의 큰 항아리 물 한 섬(一石)도 허비하지 않고 넉넉했다.
아! 기이하도다.


일찍이 논하였으니 어지러운 세상에는 武를 숭상하고 평상시에는 文을 숭상한다는 것은 야하고 추저분한 사람들의 모르는 소리다. 한고조(漢高祖 : B.C206-195재위)가 겨우 경포(원소 휘하에서 주부(主簿)를 지낸 위인)를 평정하고 노(魯)나라를 지나는 날에 먼저 공자께 제사를 지냈었다.


한의 광무(光武 : 25-27)는 隴蜀을 평정하지 못한 채  洛陽에 도읍을 정하는 초기에 맨 먼저 太學을 세웠다. 그랬기 때문에 서경의 말기에 큰 간사하고 교활한 기세가 하늘에 닿았지만 한나라를 생각하는 선비가 한번 부르자 구름처럼 합하였고, 東都이나 曹操의 무리가 구정(九鼎 : 有天下의 象微物)을 둘러서서 보면서도 끝내 감히 한나라를 폐하고 자립하지를 못했다.


이로써 본다면 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세상을 다스리는 급선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어지러움을 뽑아버리고 바름으로 돌리는 데 먼저 할 일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道가 동방(東邦)으로 온지 오래다. 안으로는 성균관이 있고 지방으로는 향교가 있어 한결 中朝 3代의 하던 대로 하고 있다.


나락 2백여 년 동안 인재를 기르고 옳은 학문을 붙잡아 앞 세대에 비하면 열배 백배뿐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노(倭奴)의 변란이 일어나 임금의 행차가 수도를 버리시고, 8도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武夫(무부)와 건장한 장정들이며 정예병사와 굳센 병졸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치고 숨기에 바빴다.


그러나 선비의 관을 쓴 무리들이 곳곳마다 서로 응하여 맨 주먹을 추켜들고 칼날을 무릅쓰며 앞선 사람이 죽으면 뒷선 사람이 이었고 관청소재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묻는 사람이 발을 싸매고 연달아 끊이지 않았으며, 군대의 문전에 양곡을 바치는 사람은 심장을 도려내듯 하면서도 걱정은 하지 않았으니, 비록 성을 공격하고 적진을 깨뜨리고 날카로운 칼날을 함몰시키고 굳은 갑옷을 부수고 하지는 못했지만 왜놈들이 감히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먹고 자지 못한 것이나 지방수령이 각 고을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선비들의 힘이었다.


이것이 어찌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윤리와 윗사람을 섬기고 어른에게 죽음으로 보답하는 지조와 임금을 존경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리가 평일부터 입에 익고 귀에 순하며 겉에 드러나고 속에 차 있었다가 하루아침에 변란이 일자 목숨도 돌볼 것이 없고 왜놈도 무섭지 않아 기다란 창과 날카로운 칼, 그리고 사람이 젓이 되고 불에 타도 피하잘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흉악한 왜구가 막 물러나고 상처도 아물기 전에 또 이렇게 힘에 겹게, 그리고 생각을 다하여 재물을 모으고 공인들을 모아 중수를 훌륭하게 하여 태평스런 옛날에 못지않게 하였으니 3대(三代 夏, 商, 周)는 말할 수 없지만 전후 한나라(兩漢)와 당, 송(唐, 宋)나라의 시대에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던가?


더러운 되놈들이 우리에게 좋은 말로 걸어올 것이 머잖아 있을 것이니 성균관에 적의 머리를 바치는 공이랴 말 하잘 것도 없는 것이다. 더러 [교화(敎化)는 나라의 급히 해야 할 일이 아니요, 세상을 경영하는 선비는 어지러운 세상에 필요가 없다!] 고 말하는 사람은 이를 살펴볼지어다.] 0년, 0월, 0일에 기문을 적다.
 


‘문묘를 중수한 기문’과 수은선생의 심경 엿보기

‘(1593년) 10월에 임금의 행차가 수도로 돌아와 예관(禮官 중앙행정부의 6관(官)의 하나)을 명하여 임시방편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케 하고 성균관(國子)의 관장(大司成 정3품 당상관직)과 부관장을 임명하여 태학(太學 : 성균관 별칭)의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문묘(文廟)의 옛터를 물 뿌려 소제(掃除)하고 문선왕(文宣王 : 공자), 顔子, 曾子이하의 배향했던 뭇 어진이의 위패를 남아 있는 재실에다 봉안케 하고 봄과 가을로 석전제(釋奠祭)를 하며 성균관 소유의 금전과 곡식으로 여러 유생들을 봉양하여 한결 보통 때와 같이 했다.’

불교를 국시로 했던 고려조와 극명하게 차이가 있음을 바로 직시해 볼 수 있는 단원이다. 국가가 아무리 왜침에 의해 참화를 겪더라도 문묘제례문화와 함꼐 인재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당시의 시대상을 말하고 있으며 경향각지에서 유생들에 의한 저력이 국력으로 이어졌는가가 과히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경자(庚子 : 1600년)에 성균관 유생 백여 명이 8도의 여러 유생들에게 글월을 돌리기를 [문묘를 중수치 못한 것은 우리의 수치다]하자, 8도의 여러 유생들도 소리를 응하여 화답하기를 [문묘를 중수치 못한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하여 서로 주머니를 기우리고 곳집을 털어 육지 길로 가고 바다 길로 가서 모두 수도로 모여드니 기둥과 서까래, 문설주의 용품과 기와며 벽돌의 재료가 곧 바로 모아지고 공인들은 권하지 않아도 잘하고 아전들은 감독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여 某年 某月 某日에 일이 시작되었는데 某年 某月 某日에 공사가 마쳐졌다.

<중략>
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세상을 다스리는 급선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어지러움을 뽑아버리고 바름으로 돌리는 데 먼저 할 일이기도 한 것이다.


<중략>
우리의 道가 동방(東邦)으로 온지 오래다. 안으로는 성균관이 있고 지방으로는 향교가 있어 한결 中朝 3代의 하던 대로 하고 있다.’

유생들은 똘똘 뭉쳐 국시인 유교문화의 문묘를 지키고자 누구라고 할 것없이 유생의 이름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며 활화산처럼 번져 구심점 역할을 했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성균관 유생이 나서서 문묘가 폐허(廢墟)로 변한걸 수치로 여기고 팔도의 유생들이 책임감을 갖고 그 누가 권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마침내 교육의 장을 재건했음을 자랑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선비의 관을 쓴 무리들이 곳곳마다 서로 응하여 맨 주먹을 추켜들고 칼날을 무릅쓰며 앞선 사람이 죽으면 뒷 선 사람이 이었고 관청소재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묻는 사람이 발을 싸매고 연달아 끊이지 않았으며, 군대의 문전에 양곡을 바치는 사람은 심장을 도려내듯 하면서도 걱정은 하지 않았으니, 비록 성을 공격하고 적진을 깨뜨리고 날카로운 칼날을 함몰시키고 굳은 갑옷을 부수고 하지는 못했지만 왜놈들이 감히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먹고 자지 못한 것이나 지방수령이 각 고을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선비들의 힘이었다.’

5월의 노래 가사에 있듯‘앞서서 싸우니 산자여 따르라!’는 식으로 앞에 선 선비가 죽으면 뒤에선 선비가 이어서 관청을 사수하였고 선비들은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며 왜군들의 간담이 서늘할 만큼 향토를 지켜냈다. 그래서 고을을 호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선비들의 불굴의 선비정신이었음을 자명(自鳴)하듯 말하고 있다.




‘흉악한 왜구가 막 물러나고 상처도 아물기 전에 또 이렇게 힘에 겹게, 그리고 생각을 다하여 재물을 모으고 공인들을 모아 중수를 훌륭하게 하여 태평스런 옛날에 못지않게 하였으니 3대(三代 夏, 商, 周)는 말할 수 없지만 전후 한나라(兩漢)와 당, 송(唐, 宋)나라의 시대에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던가?

<중략>
더러 [교화(敎化)는 나라의 급히 해야 할 일이 아니요, 세상을 경영하는 선비는 어지러운 세상에 필요가 없다!] 고 말하는 사람은 이를 살펴볼지어다.’

이러한 대목에서 민심의 이반이 간간히 보여 기가 막힌다. 그렇지만 옳은 일은 반대가 있더라도 끝까지 일괄되게 밀어부치는 불굴의 힘이 곧 선비들에게 숙명적으로 존재했다고 본다. 수은 선생은 이 대목에서 200년을 벼터온 중국의 3대(三代 夏, 商, 周)왕조를 내세워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교화(敎化)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또, 수은 선생의 글은 일반 백성들이 주로 말하는 요새 말로 지라시 수준의 말까지도 놓치지 않고 귀기우리고 듣고 그 사람들에 대한 고(告)함으로 까지 이어지는 글이 된다.
누군가 맹자가 말했던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쉽게 표현했다.


“백성은 바다요, 군주는 배”라고 말이다. 언제든지 배를 갈아 엎어버릴 수 있는 건 민심이다. 그 지라시 같은 민심을 알기 쉽게 기문에서 설명을 곁들이고 있음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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