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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신생 사효에게 주는 글 편)

나에게 달려와 줄 사람도 그대요, 붙조치게 해 줄 사람도 그대요, 앞을 서고 뒤를 서줄 사람도 그대요, 멸시할 사람을 막아줄 사람도 그대라.
등록날짜 [ 2021년10월26일 16시15분 ]

‘신생 사효에게 주는 글’라는 수은 선생의 글 중에 보기 드문 아주 부드러운 문체(文體)로 ‘신생 사효’를 찾기 위해 하물며 시집오신 분들의 족보까지 하룻밤을 지새며 다 뒤져봤으나 없었다.


존장(尊丈)이 두 번이나 언급됨에 분명코 친분이 있으면서 학식이 넘치는 집안의 문재(文才)가 있는 제자가 아닐까 싶어 이번에는 2019년 영광에서 개최된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발제자로 나선 안동교 박사가 ‘수은 강항의 강학활동과 제자양성’로 85명의 제자를 밝혀 세간의 화제가 된 자료를 살펴봤다.


놀랍게도 43번째에 ‘신생 사효’가 기록되어 있었다. 현대에 와서 시조의 대가로 알려진 신응순(辛應純 1572년(선조 5)의 장남이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이후 글들은 기분 좋게 이어갈 수 있었다. 사실 말이지 수은 선생은 불의를 보고는 결코 참지 못하는 당시 글들이 많은 부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가장 특징적인 게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죽고 나서 황금전의 벽서사건의 글이요,  순수좌를 제자로 맞이하기 전에 나눈 필담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왜의 장수들을 ‘개나 돼지보다 못한 짐승’이라고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안으로는 적중봉소에서 선조에게 조선군의 직제와 지휘체계의 문제점을 고발하듯 직언을 쏟아냈고 통제사 이순신과 원균을 비교하면서 잘못된 지휘나 인사 더 나아가 국가관, 조선의 사회실상 등을 마주할 때는 여지없이 비판을 해냈다. 이렇게 가슴속에 담아두지 않고 곧바로 직언하는 부분이 ‘간양록’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러한 글들이 차고 넘친다.


이렇게 많은 부분에 남아 있어서 매양 직설화법으로 더 유명했기에 관직을 결코 저울질하지 않았고 한양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죄인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영광 땅에 스스로 갇혀 오로지 후학양성만을 위해 세상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수은이 ‘신생 사효’에게만은 이토록 나긋나긋하게 어루만지듯 달래며 ‘지학(志學)에 힘을 쏟으라.’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문체의 흐름이라 생각된다.


신생 사효에게 주는 글(여 신생 사효 서)

고통스런 가운데에서도 부모(님) 모시고 잘 있는가? 아침, 저녁으로 상대하면 언제나 싫증이 나지 않다가도 작별한지가 철을 지나니 나의 안타까움이 어떻겠는가? 거처의 불편함이 사람의 지극한 즐거움을 망쳤는데 가정에서 시와 예(詩禮)를 묻는 그대는 잘되었네.


전날에 그대가 존장(尊丈)에게 바치는 글을 보고 馬村에서 상자에 넣어가지고 왔다가 이제야 보내니 이것은 단순히 사랑스러워서 그런 것일세. 다만 글 가운데 적힌 뜻이 나의 들은 바와는 자 못 다르네.


中庸에 이르기를 옛 것을 자꾸 익혀 새 뜻을 안다 하였으니 옛 것을 자꾸 익히지 않고 곧 바로 새 것을 알고자 한다면 새 것이 내 것이 되지 못하고 옛 것은 이미 없어져버리는 것일세.


그리고 王制에 이르기를 악정(樂正 : 樂官)이 사술(四術 : 시, 서, 예, 락의 네 가지 道)을 숭상하여 四敎를 세워서 봄, 가을에는 예와 악(禮樂)으로써 가르치고 겨울과 여름에는 시와 서(詩書)로써 가르친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禮는 오르내리고 위아래의 절차가 있고 樂은 읊으며 노래하고 춤추는 일이 있기 때문에 심한 추위는 무더운 더위에 익힐 바가 못 된 탓으로 반드시 寒熱이 적중한 때로써 하고, 시나 書는 고요히 앉아있는 가운데서라도 읽고 읊조릴 수 있어 추위와 더위에 부딪힐 필요가 없으므로 겨울과 여름에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존장(尊丈)이 그대로 하여금 날마다 赤日中에서 한 장 씩을 외우게 하는 일은 심히 잘못된 일은 아닐세. 그런데 그대의 마음에 혹시 浮熱이 있어서 時熱을 타고 한꺼번에 일을 처리하여 견디지 못한 것이 아닌가 우습구려(싶네).


그리고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며 임금을 보필하고 사람을 살리는 방도는 본디 전모훈고(典謨訓誥 : 모두 書經 文의 體)를 놓아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세. 그리고 배움을 심고 글을 길쌈하고 몸을 구출하여 甲科에 급제하는 방법도 또한 시, 서, 易, 春秋를 버리고 달리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것일세.


세상에 글(文)을 논하는 사람이 당나라에서는 한퇴지(韓退之 768-824), 유자후(柳子厚 이름은 宗元, 중국 당대의 문호, 자후는 字, 당송 8대가의 한사람.)를 세고, 송나라에서는 노소(老蘇(1008-1065) : 蘇老泉, 중국 북송의 문인,)를 세는데 한퇴지(韓退之)가 말하지 않았던가.


[위로는 舜임금과 禹임금의 큰물이 흐르는 것처럼 가히 없음을 엿보고 周誥며 殷盤 周誥, 殷盤 : 중국 殷周의 고전을 이름]의 어렵고도 껄끄러운 것과 春秋의 근엄함과 左氏 左氏 : 春秋左氏傳의 지나치게 화려하게 꾸민 글과 易經의 기이하고도 법도 있는 것과 詩經의 바르고도 화사한 것을 연구한 뒤에 밑으로 莊子 (莊子 :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莊周가 지었다고 전하는 책.)와 離騷經과 太史氏의 기록한 바와 揚子雲 司馬相如(?-118 B.C)의 같은 工 다른 曲에 이르기까지 보았다. 고 하였고, 柳子厚도 말하기를 [春秋에 근본하고 易에 근본하고 詩에 근본하고 書에 근본했다고 한뒤에야 穀梁傳을 참조하고 太史를 참조하고 孟子를 참조하고 離騷를 참조했다고 하였으며, 老蘇도 또한 6경을 먼저로 하고 맹자 韓退之의 온화하고 순진한 글과 司馬遷(1357~) B.C) 班固(32-92)의 웅장하고 강직한 글과 孫子(孫武,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의 병법가로 1권 13편의 孫子를 지음.) 吳起(중국 전국시대의 병법가, 초나라의 정승이 되어 부국강병책을 써서 공적을 세움.)의 간절한 것을 뒤에 하여 이를 던져 나아가는 길에 뜻과 같이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經學을 하는 선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장 공부를 하여 과거공부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6경을 놓아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사람들처럼 章이나 찾고 구절이나 따고 푸른색을 뽑아다가 흰색과 짝이나 맞추고 앞사람들의 필묵의 길이나 그대로 밟고 앞선 이들의 남긴 기름 냄새나 표절하여 과거급제를 따낼 것만 요행으로 여기고 자기의 솜씨는 부려보지도 못하는 그따위 짓은 대장부가 차마 할 수 없는 짓이요.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은 군자가 얻은 것으로 여기지지를 않는 것일세.


하물며 홀아비나 과부, 어리며 부모 없는 이(孤),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獨)이나 병신들을 구휼(救恤)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짓으로 그런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를 구한다는 것은 마치 고기를 구한다면서 나무를 타오르고 越나라에 간다면서 끌채(?)를 북쪽으로 하는 것이니 그 일을 더욱 부지런히 할수록 그 공부한 효과는 더욱 멀어지는 것일세.


하물며 그대의 글 속에서 말한 천하를 다스리는 大經 大法이 있겠는가. 하물며 임금에게 아뢸 수 있는 아름다운 교훈과 훌륭한 계책이 있겠는가. 그리고 맹자의 浩然之氣나 曾點의 詠歸하는 뜻도 또한 6경의 위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속 신장이나 위를 쥐어 짜내는 짓을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살며시 살펴보면 고명한 그대는 세월을 그럭저럭 보내며 놀고 즐기려는 뜻이 많고 진실한 마음 씀씀이로 애를 써서 공부를 하려는 뜻은 적으니 이런 것이 다만 근본이 되는 강령의 공부(經學)에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손해가 되는 것일세.


예를 써서 공부를 하려는 뜻은 적으니 이런 것이 다만 근본이 되는 강령의 공부(經學)에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손해가 되는 것일세. 그렇지만 무섭게 더운 날이 기름을 녹여내는 판에 좁은 방에서 머리를 부딪치며 엄한부형(嚴父兄)은 앞에 있고 三般 오고(五誥 : 書經의 篇名)는 책상에 있고 보면 그대의 괴로움도 아닌 게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걸세.


燈火可親의 계절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 천천히 기다렸다가 서늘한 때가 되면 숨을 돌릴 수 있을 걸세. 아! 세대가 멀어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니 經도 없어지고 가르침도 풀려버려 고을(鄕)에는 착한 풍속이 없고 세상에는 어진 인재가 없네.


나를 따라 배우던 사람 가운데도 뒤따라 나오는 뛰어난 인재가 많기는 했지만 이따금 준치(영광수산물 중 대표 어종)가 가시가 너무 많고 유자가 너무 시니 천하의 일이 참으로 사람의 뜻과 같이 되기가 어려운 것일세.


그런데 사람의 위력이 굳세고 튼튼하기로는 우리 뛰어난 인재 같은 사람이 드물어 전날에 서로 만날 때에는 항시 사람을 핍박하여 놀라게 하는 감탄을 했는데, 하물며 지금은 친정에서 날로 새롭게 얻는 것이 있을 터인즉 아침저녁으로 바라는 마음이 마치 어린애가 크기를 바라는 것과 가난한 사람이 가을을 기다리는 것처럼 안타깝네.


그대는 계획을 세워보게나.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선생님(子張)을 얻은 뒤로부터 앞에 빛이 나고 뒤에 광채가 났다. 내가 由를 얻은 뒤로부터 나쁜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셨으니, 무릇 공자 같은 성인으로서도 빛이 나고 광채가 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나쁜 소리를 싫어했거든 하물며 나와 같은 사람은 어쩌겠는가.


나에게 달려와서 아뢰어줄 사람도 그대요, 나에게 먼 사람이 붙조치게 해 줄 사람도 그대요, 나의 앞을 서고 뒤를 서줄 사람도 그대요, 나를 멸시할 사람을 막아줄 사람도 그대이니 네 가지의 꾸짖음을 그대는 생각을 하게.


그대가 글로 父兄에게 고하면서 곁으로 여러 어른들에게까지 미쳤는데 나는 여러 어른속의 한사람이므로 숨김없이 낱낱이 말을 하노니 그대가 살펴보기를 바라네.



‘신생 사효에게 주는 글’과 수은선생 엿보기

‘燈火可親의 계절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 천천히 기다렸다가 서늘한 때가 되면 숨을 돌릴 수 있을 걸세. 아! 세대가 멀어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니 經도 없어지고 가르침도 풀려버려 고을(鄕)에는 착한 풍속이 없고 세상에는 어진 인재가 없네. 나를 따라 배우던 사람 가운데도 뒤따라 나오는 뛰어난 인재가 많기는 했지만 이따금 준치(영광수산물 중 대표 어종)가 가시가 너무 많고 유자가 너무 시니 천하의 일이 참으로 사람의 뜻과 같이 되기가 어려운 것일세. ’


예나 지금이나 낯익은 말이 금방 들어온다.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면 등화가친의 계절이라 했다. 또, 수은 선생의 말년을 암시하는 문구가 두 군데에서나 발견된다. 그러니 ‘신생 사효’에 대한 기대심리도 애가 타도록 녹아들어있다. 제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밀고 당기듯 하는 문체에 선생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문장으로 함께 또 다시 음미해 봐도 좋을 듯하다.



‘나에게 달려와서 아뢰어줄 사람도 그대요, 나에게 먼 사람이 붙조치게 해 줄 사람도 그대요, 나의 앞을 서고 뒤를 서줄 사람도 그대요, 나를 멸시할 사람을 막아줄 사람도 그대이니 네 가지의 꾸짖음을 그대는 생각을 하게. 그대가 글로 父兄에게 고하면서 곁으로 여러 어른들에게까지 미쳤는데 나는 여러 어른속의 한사람이므로 숨김없이 낱낱이 말을 하노니 그대가 살펴보기를 바라네.’

종지부의 글이 감동 그 자체이다. 스승을 대신해 모든 것을 이뤄줄 수 있다고 애가 타듯 호소하는 글은 열거법의 문구이지만 이 서한을 받은 ‘신생 사효’의 모습과 표정이 자뭇 궁금하기까지 하다. 인간을 교화(敎化)시키려면 이 정도의 문장은 적어도 필수적인 요소는 아닐까?!


<저자 주>
신사효(辛思孝) :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공칙(公則)이며 호는 회우(晦迂)이다. 부친은 신응순(應純 1572(선조 5)1636(인조 14). 조선 중기 유학자의병. 자는 희순(希淳)이고, 호는 성재(省齋).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출신지는 전라남도 영광(靈光)이다. 영산신씨(靈山辛氏) 판서공파(判書公派) 22대손으로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7세손이고, 부친은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신영길(辛永吉)이다.

신응순은 거업(擧業: 과거 응시)을 위한 공부를 싫어하여 경학(經學)에 열중하였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영광(靈光)으로 침입하자, 향교의 위패제기(祭器)를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배에 싣고 안마도(鞍馬島)피하여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하였다. 1603(선조 36)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三等) 55위로 합격하였으나, 이후 광해군 조에 인목대비 폐비론이 불거지자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다.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곡식 수백 석을 모아 찬조하였고, 1627(인조 5) 병자호란 때는 김장생(金長生)의 소모유사(召募有司)로 곡식 3천 석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634(인조 12)에 군수(郡守) 원두표(元斗杓)의 천거로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아들로 신사(辛思孝), 신익효(辛益孝), 신흥효(辛興孝)를 두었으며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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