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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조선의 청백리 – 8회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이시백, 신독과 청렴을 실천하다.
등록날짜 [ 2023년01월31일 09시42분 ]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율기 6조’에서 “벼슬살이하는 데에 석 자의 오묘한 비결이 있으니, 첫째는 맑음〔淸〕이고, 둘째는 삼감〔愼〕이고, 셋째는 부지런함〔勤〕.”이라고 하였다.  
 
명문가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신독과 청렴을 몸소 실천한 이가 있다.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이다.

이시백은 인조반정 공신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의 아들인데, 젊어서 이항복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이항복 문하에는 명사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시백은 조익 · 장유 · 최명길 등과 가까이 지냈다. 이시백은 소탈하고 겸손하여 친구들로부터 인기가 있었는데 스승 이항복도 감탄하였다 한다.   
  
1623년에 이시백은 유생 신분으로 아버지 이귀와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지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음 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안현(鞍峴)에서 정충신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군사 삼천 명을 훈련시키고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데 호위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수어사가 되어 인조를 보호하기도 하였다. 
 
이시백은 벼락출세를 하였지만 소탈과 검소를 생활화했다. 어느 날 자기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는 마당에 까는 부들자리를 방에 깔고 부인과 함께 앉아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옛날부터 깔던 것이오. 내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외람되이 공경(公卿)에 올랐으니,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기며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써 망하기를 재촉한단 말이오. 부들자리도 오히려 불안한데, 하물며 비단 방석은 말해 무엇 하겠소?” 이러자 이시백의 부인은 부끄러워 사과하고 비단 방석을 곧 뜯어버렸다. 
 
인조는 반정공신 이귀에게 박승종의 옛집을 하사하였다. 이귀의 큰 아들인 이시백은 이 집에 살았는데 뜰 위에 한 그루의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이름은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 하였고, 세상에서는 그 꽃나무가 중국으로부터 왔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와서 임금의 명을 받았다면서 꽃나무를 캐어 가려고 하였다. 이시백은 몸소 꽃나무에 가서 그 뿌리까지 뽑아 던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인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올렸다.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는데 임금께서 어진 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하시렵니까.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인조는 그를 더욱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그의 간언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이시백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다. 평양에 이르렀을 때 대동문 밖에 기생이 한 떼를 이루었는데 복색과 단장이 화려하고 빛났다. 
 
이시백에 평양서윤(平壤庶尹 평양부시장)에게, “병자년 난리 이후에 평안도가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이를 보니 크게 이상한 일이구나.”라고 말하면서 의아해하였다. 
평양서윤이 대답하기를, “난리 후에 기생이라곤 오직 늙고 병든 자만 남아 있어 사신의 행차에 항상 체통을 이루지 못하므로, 각 고을의 관비(官婢) 가운데 자태와 재주가 있는 자를 선발하여 본부에 옮기고, 또 그 친족들로 하여금 그 의복의 비용을 맡게 하였습니다.”하였다. 
 
 
이 말에 이시백이 크게 노하여, “나라에서 평양에 서윤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 이러한 시절을 당하여 이러한 일을 하니 매우 놀랄 만한 일이구나.” 하고는, 기생들을 돌려보냈다.  
 
또한 평양감사를 불러 꾸짖기를, “지금 어찌 기생 놀이를 베풀 때인가. 아뢰어서 치죄하고 싶으나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것이니 모름지기 재촉하여 금일 내에 기생들을 모두 돌려보내되, 혹시라도 지체하여 어김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먹고살기 힘들 때였다.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에게는 기생들을 데리고 연회를 하는 것이 관례라지만, 나라가 피폐한 때에도 그 관례를 실행한 평양 감사와 서윤의 무신경을 이시백은 바로 잡았던 것이다. 
 
이시백은 1660년 나이 80세에 세상을 떴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하였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그가 살던 집은 가난한 선비 집 같았다.
사진 강진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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