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출범 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맡은 전병민이 낙마했다. 동아일보가 “전씨의 장인이 송진우의 암살 주범인 한현우”라고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한현우(1918∽2004)는 1993년 2월 21일 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신탁통치를 했을 경우 여운형을 주석으로 시키려고 했었다. 여운형을 주석으로 삼았다면 한국은 적화(赤化)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와 김일성을 막기 위해서는 신탁통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감방에 면회 온 동지들에게 여운형을 살해하라는 지령도 내렸다.”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경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이 여운형(1886∽1947)을 암살했다. 여운형에 대한 테러는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첫 번째 테러 발생 이후 여운형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테러에 시달렸다. 1947년 3월에는 계동에 있는 그의 집이 폭파되기에 이르렀고, 1947년 5월에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서 총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7월에 여운형은 12번째 테러를 피하지 못하고 암살 당했다.
7월 23일에 한지근이 체포되었다. 그는 평안북도 연변 출신의 19세 소년이었다. 30일에는 공법 혐의자로 신동운이 체포되었다. 그런데 9월6일에 신동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한지근만 기소되었다.
재판은 10월 21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1월 4일에 한지근은 무기징역이 확정되었. 재판이 끝나자, 한지근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개성의 소년형무소로 수감되었다.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한지근은 북한으로 끌려갔다.
한편 여운형 암살사건이 19세 한지근의 단독범행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6개월이 되는 1948년 1월 22일에 ‘조선중앙일보’는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에게 전달된 익명의 투서를 보도했다.
“여운형씨의 살해범 한지근은 진범이 틀림없으나 성은 한이 아니라
김이요, 나이는 20세가 아니라 25세이다. 그는 이북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나 실상은 서울에 있은 지가 4-5년 되고 범행 당시 시내 모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송진우(1945년 12월 30일), 장덕수(1947년 12월 2일) 암살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 배후는 김영철이다.”
그런데 여운홍은 그 배후를 밝히려 했지만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한편 여운형 암살사건의 진상은 여운형이 암살된 지 27년 후인 1974년이 되어서야 밝혀졌다. 김홍성, 김영성, 유용호, 김훈, 신동운은 1974년 2월 9-12일, 16일자 ‘한국일보’를 통해 자신들이 공범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증언을 살펴보자.
“한지근은 본명이 이필형이고 영변의 지주 집안 출신이다. 그는 용문중학에서 암살의 공범인 유용호와 김훈을 만났다. 한지근은 유용호아 함께 1947년 초에 대학진학을 위해 월남하였다가 먼저 월남한 김훈을 만났고, 이들은 송진우 암살의 주범이자, 격몽의숙(擊蒙義塾)의 리더인 한현우(韓賢宇) 집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한지근등은 신동운을 만났고 송진우 암살의 공범인 김인성의 동생 김영성과 함께 김홍성으로부터 치밀한 교육을 받았다. (송진우 암살 사건으로 한현우가 감옥에 갇힌 뒤에는 신동운이 격몽의숙을 이끌었다.)
이들은 이후 저동의 유풍기업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풍기업은 극우 청년단체인 ‘양호단’이 접수한 적산 건물로 2층은 월남민들에게 세를 주고 있었다.
한편 한현우의 지시에 따라 여운형 암살을 모의하던 신동운·김홍성은 ‘백의사’ 고문 김영철(당시 60대 초반이던 김영철은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다고 함. 한인 애국단은 1931년에 김구가 일제의 중요한 인물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만든 독립운동 단체이다.
1932년 이봉창의 도쿄 의거, 윤봉길의 상해 의거 등이 한인애국단의 대표적인 활동이었다.)의 소개로 ‘백의사’ 단장 염동진을 만났다. 염동진은 “여운형은 민족 분열을 조장하는 야심가”라면서 이들에게 미제 45구경 권총 두 자루를 건네주었다.
한지근 등은 7월 초부터 행동 개시를 하여 17일에 범행장소를 혜화동 로타리로 정했으며, 제1저격수 한지근, 제2저격수 겸 현장지휘 김훈, 도피확인자 유용호·김영성 등으로 역할을 분담했고, 7월 19일에 암살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박태균·정창현지음, 암살,역사인,2016, P110-116)
그런데 공범들 주장의 ‘신빙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자 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은 이들의 주장이 여운형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여운형 암살의 배후엔 극우 단체 ‘백의사’와 ‘양호단’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