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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교토의 코무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에도막부 유학자 하야시 라잔 (林羅山 1583-1657)에 의해 코무덤이 귀 무덤으로 둔갑된 것
등록날짜 [ 2022년12월27일 08시25분 ]
 2019년 6월 중순에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강항 선생에  대한 답사를 하였다. 행선지는 교토와 오사카, 시코쿠의 오즈시 등이었다.  
 
교토에서는 코무덤과 풍국신사(豊國神社)를 찾았다. 코무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풍국신사 앞 대로변에 있다. 먼저 코무덤 안내판을 보았다. 안내판은 2003년에 교토시에서 만들었는데 일본어와 한글로 되어 있다.     
 
귀무덤 耳塚 (코무덤 鼻塚)
이 무덤은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 (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군민(軍民)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행하여 졌다 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귀무덤(코무덤)의 유래이다. 
 
귀무덤(코무덤)은 사적 오도이(御士居) 토성등과 함께 교토에 현존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유적 중의 하나이며 무덤위에 세워진 오륜석탑은 1643년에 그려진 그림 지도에도 이미 그 모습이 나타나 있어 무덤이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니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 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유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교 토 시 
                             평성 15년 (2003년) 3월 
 
그런데 2003년에 교토시는 안내판에 왜 귀무덤(코무덤)으로 병기(倂記)하였을까?  
 
원래 이 무덤은 코 무덤이었다. 1597년 9월 2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보내 온 수만 개의 코를 대불전 서쪽에 묻으면서 봉분 위에 육중한 오륜탑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 날인 9월 28일에 히데요시는 세가키(施餓鬼) 법회 즉 공양의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 법회는 상국사 주지 세이코 쇼타이(1548-1607)가 주관하고 400여 명의 승려가 모여 공양하였다. 법회는 겉으로는 비명횡사한 조선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자비심을 베푸는 의식이었지만, 실은 히데요시의 군공과 위엄을 과시하는 행사였다. 
 
한편 공양의식을 주관한 세이코 쇼타이는 비문에 코무덤이라고 적었다.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강항(1567-1618)도 『간양록』에서 코무덤에 관한 글을 적었다. 
 
수길이 조선을 재침략하려 할 때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기를, “사람의 귀는 각각 둘이지만 코는 하나다.” 하고, 군사 한 명이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하나씩 베어서 수급(首級)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것을 왜경으로 수송케 하여 쌓아 놓은 것이 하나의 구릉(丘陵)을 이루자 대불사(大佛寺) 옆에 묻으니 거의 애탕산(愛宕山)의 산허리와 그 높이가 같았다. 혈육의 참화는 이를 들어 가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을 모아 제사 지내려고 하면서 나에게 제문을 지으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지었다. 
 
“코와 귀는 서쪽에 묻혀 언덕을 이루었고, 뱀처럼 사나운 놈들이 동쪽에 감추어 있도다. 마른고기 되어 소금에 절이고 물고기 밥으로 배 불렸으니, 차마 향불을 올리지 못하네.”
 
정유재란 의병장 임환의 한시에도 코 없는 사람의 슬픔이 적혀 있다. 
(출처 : 습정유고)
 
코 없는 자 (無鼻者) 
코 없는 자, 누구 집 자식인고
산기슭에 홀로 앉아 얼굴 가리고 우네
적병이 날카로운 칼 휘둘러 바람이 일자 
하나 베이고 둘 베이고, 천 백인의 코 달아났네. 
 
또한 1607년 조선의 1607년 1차 회답겸쇄환사의 부사 경섬의 『해사록』에도 코무덤으로 기록되어 있다.    
“1607년 4월 9일 
 
맑음. 대판(오사카)에 머물렀다. (중략) 대판은 곧 수길의 아들 수뢰가 살고 있는 곳이다. 수뢰의 그때 나이 15세로, 기안(氣岸)이 웅대하며, 음식을 먹을 적에도 풍악을 폐하지 않았다. 오직 호화와 사치를 스스로 즐기며 처사가 대부분 유약하므로 왜인들이 우활(迂濶)하다고 하였다. 
 
 왜경(倭京)의 동교(東郊)에 우리나라 사람의 비총(鼻塚)이 있다. 대개, 왜국이 서로 전쟁할 적에 반드시 사람의 코를 베어 마치 헌괵(獻馘)하듯이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진년 난리 때에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거둬 모아 한 곳에 묻고 흙을 쌓아서 무덤을 만든 것이다.
 
수뢰가 비를 세웠는데, 새기기를, “너희들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의 운수가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참호(塹壕)를 파고 담을 둘러쌓아 밟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그의 어미가 수뢰를 위해 불사(佛事)를 많이 행하여 뒷일을 빌었다 한다. (후략)”
사진 1 교토의 코무덤
그런데  코무덤이 귀 무덤으로 둔갑된 것은 에도막부의 관학파 유학자 하야시 라잔 (林羅山 1583-1657)에 의해서이다. 라잔은 1642년에 출간한 『풍신수길보』에서 코무덤을 귀무덤으로 불렀다.

하야시는 코무덤이라고 하면 잔혹성과 야만성을 드러낼 수 있어서 귀무덤으로 미화한 것이다.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잔혹성과 야만성이 없어지지 않겠지만, 세월이 100년 이상 지나자 사람들은 코 무덤을 아예 귀무덤으로 바꾸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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